[05/9월] 훔쳐보기로 짜릿했던 한여름, 도청과 관음증

일터기사

[칼럼]

훔쳐보기로 짜릿했던 한여름, 도청과 관음증
자유기고가 김연희

유명한 영화감독 히치콕의 작품 중에는 관음증을 소재로 한 ‘이창’, ‘사이코’, ‘프렌지’ 등이 있다. ‘이창’의 남자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왼쪽 발이 부러진 상태로 살아가면서, 남의 집 창문을 엿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사이코’의 남자주인공 앤서니 퍼킨스(노만 베이츠) 역시 벽에 몰래 구멍을 뚫어놓은 뒤 자신의 모텔에 우연히 들른 여자 손님 자넷 리의 목욕 장면을 훔쳐본다. 이 때 앤서니 퍼킨스의 시선은 완전히 여주인공 자넷 리를 포위한 상태로 그녀는 자그마한 원 안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히치콕의 다른 영화 ‘프렌지’에서 관객은 초반에 이니셜이 들어간 장식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자들의 목을 조른 넥타이 살인범이 과일가게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함정에 빠진 주인공을 보는 초조함에다 살인은 천천히 다가온다. 게다가 우리는 노먼 베이츠와 함께 몰래 그녀를 훔쳐보는 공범의식까지도 공유했다. 그러나 살인의 순간은 짧다. 휘두르는 칼날이나 조르는 밧줄과 함께 보유했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정되는 쾌감, 관음증이라는 안전한 응시의 둑에 갇혀 있던 공포는 물밀듯한 속도로 체내를 빠져나간다. 공포가 쾌락이 되는 지점, 이것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 영화를 평가한 그대로다.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 따라서 히치콕의 작품들은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소재로 하되, 그 욕망의 반전을 기대한다.

관음증은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도시증, 절시증, 암소공포증이라고도 한다. 관음증을 가진 환자는 일반적으로 그 대상자와 성관계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나체나 성교 장면을 몰래 보면서 자위행위를 통하여 성욕을 해소하거나 후에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위행위를 한다고 한다. 이 증세가 6개월 이상 지속되었을 때 신경정신과에서는 관음증 환자로 진단한다. 관음증으로 진단받을 정도가 되면 훔쳐보기의 정도가 지나치게 되어 일종의 중독상태에 들어간다. 어느 누구도 훔쳐보기라는 행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환자는 반복적이고 몽상적인 상태에서 중독에 빠지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공상,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임상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거나 사회, 직업적 또는 기타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장애를 초래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에게 많이 나타나고, 15세 이전에 발병하며 만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관음증이 생기는 원인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어린 시절에 우연히 성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려는 충동이 지속되는 것인데, 성인이 되었을 때 수동적으로 경험하였던 것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원인은 스릴과 흥분이 있는 불안한 상황에서만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정서의 불안정한 성장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관음증의 핵심은 나는 보는데 상대방은 그 시선을 모르는 데 있다. 그것은 매우 안전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시각적 쾌락을 배가시켜주는 동력체이다. 그래서 응시의 방향은 권력의 위치를 결정짓는다. 관음증은 일방적인 시각에 의존하며 정보와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기초할 때 성립한다. 많은 남성들 (혹은 여성들)이 여성(혹은 남성)의 목욕장면이나 섹스 장면 등을 훔쳐보며 긴장과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람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 불평등한 관계, 권력과 권력에 의해 지배받는 관계로부터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관음증은 권력을 상징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조지 오웰이 상상했던 정보사회감시와 통제, 교육행정정보 시스템(NEIS=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으로 이름 지어졌던 교육 관료에 의한 학생들의 지배 등은 이미 잘 알려진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종의 관음증적 행위들이다.

도청은 정보사회의 기술진보로 인하여 발전된 관음증의 한 형태이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담아 인터넷공간에 유포시켰던 몰래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도청은 비교적 단순한 한두 가지 감각, 예를 들어 시각이나 청각을 구별하여 관음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도청이 비밀스럽게 획득하는 것은 ‘소리’라는 감각이 아니라, 언어와 행동을 포착하는 일종의 행동에 가깝다. 더구나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행위이며 도청을 당하는 사람은 도청을 하는 사람에게 지배되고 있는 일종의 권력관계이다. 따라서 도청의 최종적인 목표는 지배이며, 그 지배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저급한 관음증의 일종인 셈이다. 창문 넘어 옆집 여자의 성적 행위를 비밀스럽게 살펴보는 행위가 개인적인 상상력과 충동의 과잉으로 비롯되었다면, 국가권력에 의하여 정적(政敵)을 감시하고 권력 내부를 정화하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재생산해가는 도청은 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상징일 수 있다.

국가안전기획부 – 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1990년 이래 진행되어 온 10여년의 도청 역사는 이제 권력의 특성을 대다수 민중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하고 있다. 도청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새로운 집단적 관음증의 수단이다. 그 수단을 체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배적인 권력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노조 경영의 역사를 자랑하며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도청’하던 “삼성 그룹”의 권력자들마저 조직화된 또 다른 관음증 환자들에게 미친 듯이 도청되고 말았다. 이제 그 뿌리를 캐기 위하여 관음을 즐기던 경찰과 검찰이 나서서 다른 관음자들을 색출하겠다고 떠들고 있다. 가히 광란과 중독의 깊이가 정신의학의 경지로는 설명될 수 없는 지경이다.

관음증은 일반적으로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충동적인 경험을 교정하도록 접근하거나, 관음적 행동을 잘못된 행동으로 정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행동을 인식하게 하거나, 성욕 그 자체를 감소하게 하기 위한 호르몬이나 약물을 적용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도청을 즐겼는지 혹은 누가 누구를 도청하였는지 알 수 없고, 관음에 참여한 스스로를 애국자로 참칭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권력에 의한 관음증이 치유될 리 만무하다. 국가정보원과 안전기획부의 예산을 투명하게 하자는 한나라당이나 정보기관을 새로 만들자는 민주노동당 노회찬의원의 설득이 대안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국가 권력 자체가 지배와 배제, 일방성, 불평등을 기초로 운영되고 재생산되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요소요소들은 서로가 관음과 도청의 줄사다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일 터지는 도청과 관음의 역겨운 행위들이 작은 창문을 통해 가느다란 신음소리로 연신 들려온다. 이번 여름에는 노동자들도 상당히 자극적인 관음꺼리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만의 시각으로 충분히 즐기고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훔쳐보기는 짜릿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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