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전자파 ‘건강 위협’ 본격대응 신호탄

전자파 ‘건강 위협’ 본격대응 신호탄

전기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조차 어려울 법하다. 공기를 숨 쉬듯 전기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전기가 주는 풍요로운 혜택만큼이나 그늘도 짙어가고 있다. 전기가 흐르는
곳엔 언제나 존재하는 전자파 때문. 길가의 전선이나 집안의 가전제품, 전철 같은
교통수단, 사무실의 각종 기기, 휴대폰 등 전자파는 사실상 현대인의 일상을 언제,
어디서나 포위하고 있다.

마이크로파 등 인체에 열(熱)작용을 일으키는 일부 전자파의 유해성은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됐다. 하지만 전자제품, 전철, 송전선로 같은 극저주파(0∼1㎑)에 의한
자극(非熱작용)에 대해선 학자마다 엇갈린 연구결과를 내놓는 등 지난 1980년대부터
20여년동안 유해성 논란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적어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데
대해선 별다른 이견이 없다.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심증만큼은 굳힌
셈이다. 이에 따라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서는 갈수록 전자파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가면서 권고·규제기준 설정 등 정책 반영의 폭과 깊이를 넓혀가는 중이다.

●“국민건강 영향 감안한 지침”

환경연구원이 이번에 제시한 ‘안전거리 지침’도 이런 국제적 추세를 적극 반영한
결과다.“최소한 이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는 기준인데, 우리나라도
전자파의 ‘건강 위험성’에 대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장성기 실내환경사업단장은 “가전제품 등의 극저주파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증거는
불확실하지만 사전예방적 차원에서 지침을 제시했다. 전자파에 대한 높은 대중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나 자료는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 연구는 정부차원에서 실태조사를 벌여 국민건강을 고려한 최소한의 이격거리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통·산자부 ‘인체보호기준’은 느슨

환경연구원이 조사한 14개 품목,138개 가전제품의 전자파 방출실태는 기존의 연구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품별 평균 방출량이 많게는 76.9mG(전자레인지), 적게는
0.9mG(김치냉장고)였다. 그동안 학계나 업계 등에서 간간이 조사해 발표해 온 수치와
비슷한 수준으로, 지난 2000년과 2004년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가 각각 제정한
‘전자파 인체보호기준’(833mG)을 훨씬 밑돌고 있다. 그럼에도 환경연구원의 권고는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헤어드라이기(64.7mG 아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안전)
▲전기장판(13.8mG 아이와 임신부는 절대 사용 말아야) ▲전자레인지(76.9mG 아예 아이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세탁기(6.9mG 탈수시엔 접근 금지) 등이다.

정통부 등의 인체보호기준은 신경과 근육조직의 쇼크와 같은 직접적 인체 영향을
방지하기 위해 ‘순간 최대 노출치’를 정한 것이어서, 일상에서 되풀이되는 노출로 인한
인체건강 위해성 방지기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환경연구원의 판단이다. 국내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현재의 인체보호기준이 주거 환경에서 측정되는 통상적 수치보다 매우
높게 설정돼 있다.”(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전인수 박사)는 비판도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우리는 이제 막 ‘권고 지침’을 정했을 뿐이지만, 외국은 훨씬 잰 걸음이다. 스위스나
스웨덴 이탈리아 미국의 일부 주 등에선 수년전부터 2∼10mG를 각종 ‘규제기준’으로
설정하는 등 엄격한 관리대책을 시행 중이다. 최근 많은 역학연구 조사에서 밝혀진 “2mG
이상의 60㎐ 극저주파에 장기간 노출시 소아백혈병 등의 암 발생률이 높아진다.”는
경고를 정책으로 반영한 것이다.

연세대 의대 김덕원 교수는 이에 대해 “흡연과 폐암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 40년이
걸렸지만 전자파 유해성의 과학적 확증은 이보다 훨씬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해가 될 수 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안전거리 설정 등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전철 승객도 무방비 노출

환경연구원은 지난 한해 동안 전국 지하철 구간에서의 전자파 방출량도 동시에
측정했다.2000년에 이어 두번째 조사인데 이번엔 조사대상을 늘렸다.1∼8호선의
직류·교류 노선과 분당선, 국철 등 서울의 14개 구간과 부산 2개, 대구·인천·광주 각
1개 등 총 19개 노선이다.

헤어드라이기(위)와 전철 객실내 전자파 방출량을 조사하는 모습.가전제품은 표면에서 3m
떨어진 곳까지 5개 지점에서,전철은 객실 내 3개 지점에서 각각 측정됐다.

수도권 전철 안산선(선바위∼오이도)의 객실 내 평균 방출량이 28.5mG로 가장 높았고,
경인선(남영∼인천), 의정부선(회기∼의정부북부), 분당선(선릉∼오리) 등 순으로
높았다. 광주지하철(상무∼소태)은 0.2mG로 가장 낮았다. 연구원은 “수만 볼트의
교류전원 사용구간이 직류구간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전자파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특히 건강위험성과 관련한 가장 엄격한 척도인 ‘2mG’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19개 구간
가운데 11개 구간(객실내)이 이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성기 단장은 “하루
600만명 이상이 이용하는 국내 전철의 전자파 방출 수준은 비교적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면서도 “그러나 장시간 노출될 경우 전자파 영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말하기엔 어렵다.”고 말했다.

●법제화까진 시일 걸릴 듯

환경부는 10여년 전부터 전자파의 유해성 및 규제기준 강화 등을 주장하며 법제화를
시도해 왔다.2001년과 2002년 전자파를 생활환경오염원에 포함시킨 환경정책기본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정통부, 산자부를 비롯한 정부와 기업 등 안팎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환경부를 중심으로 “외국에선 발암성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데도 기업의
경쟁력 저하와 막대한 사회적 비용발생, 시기상조 등을 이유로 무조건 반대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은 소수에 그쳤다.

법제화 움직임은 지난해 7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의원입법으로 환경분쟁조정법
개정안이 발의돼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인데,“전자파로 인한 피해도
소음·진동·악취 등과 마찬가지로 환경분쟁조정 대상에 넣어 피해구제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그러나 여태까지 상임위 심의조차 진행되지 않아 시행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한노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