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부탁하네, 나를 잊지 말아주게

[손석춘 칼럼] 부탁하네, 나를 잊지 말아주게

오마이뉴스 손석춘 기자] 새빨간 핏덩이였다. 돌아가는 재봉틀에 쏟아졌다. 피 쏟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더불어 일하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부랴부랴 돈을 걷었다. 병원으로 옮겼다. 폐병 3기. 각혈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새빨간 피를 쏟은 새하얀 여성 노동자는. 사장은 잔인했다. 해고했다. 가정해 보라.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그 여성의 동료였다면. 무엇을 했을까. 스물 두 살. 한 노동자의 맑은 눈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동료를 모았다. 그러나 벽은 두터웠다. 마침내 그는 몸에 석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그었다.

전태일. 오는 13일이 그의 34주기다. 행여 오늘이 그 시절이 아니라고 안도하지 말라. '새빨간 핏덩이'는 34년 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 일이다. 지금 이 순간도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간다.

2003년 한해에 산재를 당한 노동자는 9만4924명이다. 그 가운데 2923명이 사망했다. 하루 8명 꼴이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흔히 숫자만 읽고 넘어간다.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와 같다는 말조차 진부하게 듣는 세태 아닌가. 그렇다. 우리 어느새 잔인한 인간들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전태일 34주기 앞에 부끄러운 까닭

하지만 전태일의 기일을 맞아 한번이라도 톺아볼 일이다. 일터에서 죽어 가는 노동자는 해마다 가파르게 치솟는다. 1999년에는 2291명이 숨졌다. 2000년엔 2528명, 2001년에는 2748명, 2002년은 2605명이다.

거듭 분노를 삼키며 쓴다. 출근할 때 웃으며 간 아빠가, 엄마가, 사랑하는 연인이 비명에 숨져가도 좋은가. 새빨간 핏덩이에 분노한 전태일 앞에 우리 부끄럽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고 강변하지 말기 바란다. 어느 기업인처럼 어느 정치인처럼 노동자들의 음주 탓으로 돌리는 파렴치는 더욱 접기 바란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권력을 누리는 자들과 돈을 쥔 자들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전태일은 '유서'에서 호소했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가 잊지 말라는 것은 당시 언론이 축소해 내보낸 '사회면 사건'이 아니다. 새빨간 핏덩이 앞에 선 노동자의 분노다. 거듭 묻는다. 과연 우리 저 가파르게 치솟는 '참사' 앞에 떳떳한가.

명토박아 두자. 그것은 타살이다. 기업의 '노동자 살인'이다. 과격하다고 눈흘길 일이 아니다. 실제로 유럽의 대다수 나라에서 그렇게 처벌한다. 왜 유럽과 비교하느냐고 더러 모들눈을 뜨는 자들이 있다.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왜 비교하지 않는가를 물어야 옳지 않은가. 얼마든지 가능한 정책이 있는 데 외면하는 자들에게 마땅히 돌 던져야 하지 않은가.

'노동자 살해'에 왜 돌 던지지 않나

가령 일터에서 산재사망자가 1명이라도 일어나면 스웨덴 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편집한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가 없다. 모두 그렇다. 언론의 '대서특필'에 이어 수사가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관리 책임'이 드러나면 기업인을 구속한다. 그 결과다. 한 해 사망자가 20명 안팎이다. 인구를 감안해도 비교할 수 없는 수치다.

하지만 보라. 이 땅의 수구언론들을. 틈날 때마다 '노동자 마녀사냥'에 나서지 않은가. 산재 사망을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하는 신문이 있는가. 방송이 있는가. 재벌 회장이 구속된 바 있는가.

산재사고에서도 비정규직은 '차별'이 크다. 확연히 더 많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해소를 내건 파업에 다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다. 희망 아닌가. 오늘 전태일을 잊지 않은 노동자들이 있다는 작은 '신호' 아닌가. 그 민주노총이 11일로 9돌을 맞았다.

날마다 노동자를 '살해'하면서도 언죽번죽 '음주 버릇' 따위를 들먹이는 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언론의 부라퀴들과 애면글면 싸우는 민주노총에, 오늘 돌을 던지는 자 누구인가.
한노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