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2021-10 이러쿵 저러쿵] 참 다정했던 사람 이훈구를 기억하며

일터기사

참 다정했던 사람 이훈구를 기억하며

-고 이훈구 활동가 1주기 추모 맞이의 글

성희영 고 이훈구 활동가 후배, 페미니스트 북카페 펨femm

 

이제 일주년이 지났는데 마치 몇 년이 지 나버린 것 같다. 훈구 형과 많은 시간을 같은 가치와 목표로 활동했던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일터>에 추모 글을 실을 기회가 나에게 온 것은 투병 생활을 하던 몇 년의 인연 때문이겠지.

둘째가 아주대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하던 날 훈구 형이 수술로 입원을 했던 때라 훈구형을 면회 온 후배를 우연치 않게 만나면서 형 의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됐다. 사람들을 통해서 형의 소식을 듣긴 했지만 후배와의 우연한 만 남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우리 동네로 이사를 했다는 얘긴 이미 들었고 암으로 치료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나다 얼굴 보면 동네에서 보자고 몇 번을 얘기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밥 한 번 먹자.’라는 인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훈구 형을 만나러 수원으로 오는 중이라는 Y선배의 연락을 받고 다음에 내려올 땐 같이 보자며 그렇게 또 지나쳤다.

학교를 졸업하고 정치조직에 들어가면서 만나게 됐던 훈구 형은 먼 선배, 인사만 하는 선배 정도였다. 그러다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단체 활동을 하면서, 훈구 형과 함께 사는 K선배네 놀러 가면 자연스레 같이 술 한잔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가 됐다. 나에게 훈구 형은 나이 많은, 따분한 사회·정치이야기만 늘어놓는 선배라고 생각했다. 가끔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불편한 선배였다. 그러니 서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훈구 형이 내가 사는 지역으로 삶과 활동공간을 이전하게 되면서 촛불문화제에서 만나거나 함께 노동인권 교육안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접점이 다시 생겼다. 선배를 자주 만나고 얘기도 많이 나눠서인지, 아니면 내가 연륜(?)이 쌓여서 그런건지, 예전과 다르게 불편함은 없어졌고 선배의 유머코드도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지역에서 ‘아이구’라는 별명으로 만나게 되니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던 것 같다. (서열, 나이, 위계를 거스르는 별명사용의 힘이 아닐까).

우리 동네 사람이 되고 병원에서 만난 이후로 일주일에 1~2번씩은 만나서 집 앞 산책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누게 되었다.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같이 집으로 가서 복작대는 날들도 있었고 모기를 너무 싫어했던 훈구 형을 위해서 안방 창문에 모기장을 첫째 아이와 남편이 붙이고 오기도 했다. 첫째 아이에게 훈구 삼촌은 함께 스포츠경기를 보면서 친구처럼 이야기 나누고 자신의 관심사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어른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때엔 삼촌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했지만 데리고 가지 않았다. 농담 잘하고 친절한 삼촌이 사람을 잘 못 알아보고 잠만 자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않아서였다.

형을 동네에서 봤을 때는 집 앞 공원을 4바퀴, 5바퀴씩 돌만큼 건강해 보였다. 잘 먹는 게 중요하니까 생협 음식으로 먹자며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같이 보러 갔다. 요즘처럼 잘 먹고 비싼 것 먹은 적도 없다면서 얘기할 때마다 물어 봤었다. ‘그래서 싫어요?’ 물으면 좋단다. 그러고 보면 형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사실과 생각에 대한 것들은 잘 말했지만 말이다. 형의 어릴 적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때도 마치 남의 가정사 말하듯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특유의 시니컬한 모습으로 말했었다. 육십이 넘어도 어릴 때의 기억들과 상황들에서 받은 상처는 그대로였던 것 같다. 내가 조금 더 교감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것은 그런거다.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의 당시 감정들에 대해 들어보는 걸 못한 게 말이다. 마침 일을 안하고 있던 남편이 훈구 형과 자주 만나서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공감해 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지나고 나니 후회되는 일도 많다. “기영이 가게 열었는데 한 번 가야 하는데”라고 몇 번을 얘기했었는데, 건강이 조금 좋아지면 가자고 계속 미뤘던 것도 후회이고 좀 더 밥을 같이 먹을 걸 그랬다는 후회도 든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더 외롭다는 걸 모르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형이 괜찮다고 했던 건, 사실 괜찮은 건 아니었다. 후배가, 사람들이 불편하고 폐를 끼치게 될까 봐 항상 자신의 욕구는 뒷전이었다. 아프니깐, 요구해도 될 것을….

작년 7월, 잘 먹지도 못하고 배변도 원활하지 않고 몸이 더 좋지 않아져서 잠시 입원 했었는데 문득 사진 한 장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제일 후회가 사진 한 장 같이 찍은 게 없었던 것이 생각나 서 후딱 한 장 찍었다. 무슨 사진이냐며 말하는 통에 제대로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지만, 그 사진을 보면 훈구 형의 말투며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가시기 전 잠깐 깼다고 간병인 선생님에게 연락이 와 서 얼굴을 보러 갔다. 힘도 없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너랑 기영이가 있어서 잘 지낼 수 있었다.”는 말이 마지막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이 참 고맙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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