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오직 가해자의 것이다
유상철 노무사, 노무법인 필
지난 9월 중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복잡한 일이 생겨, 상담받고 싶다는 거였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이 많이 떨릴뿐더러, 불안감과 무력감마저 느껴져 일정을 서둘러 만나기로 했다. 얼마 안 있어 만난 K는 노트북과 관련 자료들을 주섬주섬 꺼내며, 일자별로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곱씹고 되뇌었는지 쉬지도 않고, 사건 경위를 줄줄 읊어나갔다. 물론 평이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본인이 집착하는 사건이나 억울함과 충격이 큰 사건을 말할 때면, 시시콜콜한 설명을 늘어놓곤 했다. 조심스럽게 “혹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은 받고 있니?”라고 묻자, “1달 전부터 다니곤 있는데, 지금 뭘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모르겠다”라는 푸념이 돌아왔다.
K가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해 2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 남성직원이 “○○○ 어떻게 생각해요? 한번 만나볼래요?”라며 소개팅을 주선하듯 굴었다. K는 “남자친구 있어요. 저는 ○○○ 만날 생각 없으니,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라며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그렇게 끝난 줄로만 알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1달 뒤 K가 업무 중 우연히 남성직원의 컴퓨터 속 사내메신저를 목격하며 사건은 시작된다. 소개를 주선하고자 했던 남성직원을 포함한 3명은 사내메신저에서 K에 대해 “입구컷 당했네”, “아줌마 싫어요”, “팔자걸음 싫어요”, “뚱뚱이 취향 아님” 등 외모를 비하하며, 성희롱을 지속했던 정황을 목격한 것이다. 곧바로 상급자에게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조치를 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평소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지시를 내리던 상급자인 탓에 K로서도 용기 내 요구한 것이었지만, 돌아온 건 업무범위를 벗어난 업무지시와 벽을 손으로 치고 발로 차는 등 고함과 폭언이 함께한 강도 높은 질책이었다.
일하던 사무실은 10여 명이 근무하는 곳이었지만, 그중 K만 여성이었다. 문제를 나눌 사람마저 마땅치 않은 상황은 쉽게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라는 자책을 불러일으켰고, 그렇게 스스로 고립돼 갔다. 더는 감내하기 어려워 총괄책임자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오히려 총괄책임자는 K를 상대로 성추행(강제추행치상)을 저질렀다. 그는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구하는 듯했으나, “곧 과장!”이란 메시지를 보내며 승진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 이후 K와 총괄책임자 쌍방이 각서를 쓰고 사건을 잘 마무리하자는 등 권한을 남용해 2차 가해를 저질렀고, K가 이를 거부하자 괴롭힘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결국 총괄책임자에게 형사 고소를 진행했고, 다른 가해자들에게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으로 신고한 상황에서 나를 찾아오게 됐다.
신고 접수 후 회사의 징계 조치까지 걸린 시간은 약 1.5개월로, 나름 신속하게 진행된 듯하나 징계 양정이 행위보다 턱없이 낮았다. 괴롭힘과 2차 가해를 저지른 상급자는 정직 1개월, 성희롱 가해자들은 견책, 성추행 2차 가해자들은 경고에 그쳤다. 총괄책임자는 형사 고소 직후 면직처리 됐으나, 그 사이 경력직으로 다른 기관에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채용됐다. K는 3.5개월가량 유급병가를 받았지만, 원직으로 복직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전보조치 됐다. 상급자는 1개월간의 정직기간 중에도 회사에 드나들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으며, 이후 원직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K는 불면과 불안, 우울, 수면장애 등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체중이 급격하게 감소한 상황이다. 회사에선 나름대로 관련 법에 따라 조치했다 하지만, K 입장에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만 벌어지는 중이다. 불과 10개월 전만 하더라도 경력직으로 채용됐다고 환호성을 질렀는데, 지금은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K는 자신이 원직으로 돌아가길,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길 원하고 있다. 모두 K가 바라는 대로 되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우선 K의 신체적 이상상태에 대한 요양신청을 중심으로 대응하며, 나머지 다른 사안은 향후 상황에 따라 진행하자고 다독이는 중이다. 상담 초기부터 해당 사건이 자칫 유족사건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요양신청이라도 서둘러야겠단 마음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요즘 드라마 〈구경이〉에 대한 얘기가 한창이다. 이야기 속 빌런인 ‘케이’는 죽어 마땅하다고 사회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죽인 뒤, 이를 사고사나 자살로 치밀하게 위장해 사건을 은폐한다. 〈구경이〉의 흥행엔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다를 게 없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무력과 분노를 대변해서가 아닐까. 케이의 행동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K를 다독이는 게 과연 맞는 것인지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K는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며, 잘 살아가야 한다. 고통에 빠져야 하는 건 K가 아니라, 가해자들이다. 그런데 왜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떵떵거리며 회사와 사회 곳곳을 활보하며 사는 걸까.
K와 나는 형사 사건과 요양신청 결과가 나오면 2차전을 준비할 계획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K의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게 중요한 상황이라, 서두르지 않고 힘을 축적하려고 한다. 집요한 2차전을 위해서다. 그러니 “K야, 힘내서 함께 싸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