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프락치'로 단정했던 그 사내가 박일수 동지였다니…

'프락치'로 단정했던 그 사내가 박일수 동지였다니…
 서울역광장 농성천막에서 머뭇거리던 '수상쩍던' 사람이

노동과세계  제276호 
이승철 


2003년 11월이었던가. 서울역광장 민주노총 농성천막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을 때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어닥치던 그 날 밤, 광장 한켠에 마련된 김주익 등 노동열사 합동분향소 앞에서 말쑥한 양복 차림의 한 사내가 고인들의 영정을 하나하나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잔뜩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광장을 지나가는 그 겨울밤에,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부동자세로 영정을 들여다보는 사내의 모습은 몹시 낯설기만 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가지도 꿈쩍 않던 사내는 이윽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추운 날씨에 농성하느라 고생 많으시죠."
"뭘요. 고생은…"
"참, 이런 일이 없어야 할텐데…"
초면의 대화가 그렇듯, 사내와 나도 상투적인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사내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오랫동안 헤어졌던 딸을 방송국에서 찾아준다기에 올라왔다"고 했다.
"조합원이냐"고 물었더니 그저 얼버무리고 말았다. 순간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농성천막 주변에 사복경찰의 출몰이 잦았던 때였다. 게다가 회사 이야기에 머뭇대는 그의 태도가 좀 수상쩍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현대중공업 노조활동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예, 잘 알지요 뭐…"라고 얼버무렸다. 해고된 지 오랜 한 활동가 이름을 대며 "아직도 거기서 일하느냐"고 묻자 "예"라는 답이 돌아왔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경찰이거나, 경찰 끄나풀(프락치)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확신이 서자 나는 사내의 천막출입을 가로막은 채 건성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추운 날씨에 귀가 시려왔다. 왜, 이 사내가 자리를 뜨지 않고 민주노총 활동에 대해 캐묻는지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석달쯤이 지난 오늘, 2004년 2월14일.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절규하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가 분신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한 인터넷신문에 실린 박일수 동지의 사진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농성천막 앞에서 열사들의 영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사내.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에 대한 나의 '심문'에 얼버무리던 그 사내. 내가 경찰 끄나풀로 확신했던 그 사내가 방송국에서 딸과 재회하는 사진이 그 인터넷신문에 뚜렷이 실려 있었다. 맙소사…
이제는 서울역광장의 그 사내가 왜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에 대한 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했는지 알 것 같다. 그 때 나는 그 사내가 사내하청 노동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스스로 "난 사내하청 노동자요"라고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운 게 우리사회의 현실임을 까맣게 잊은 채, 민주노총 활동가인 나는 그가 '프락치'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중공업에 다닌다'는 얘기도, '오래 전에 헤어진 딸을 만나러 왔다'는 말도 다 거짓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의 서울역광장.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인파 속에서 열사들의 영정을 응시하던 박일수 동지는 오늘 비정규직 차별에 항거해 자신의 몸을 살랐다.
"꼭 이겨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는 열차시간에 맞춰 발길을 돌리면서 그렇게 부탁했었다.
그 때도 나는 의심에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딸을 꼭 찾으시라"고 건성으로 답했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 언 몸을 녹일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
"꼭 이겨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 날 그가 떠나며 남긴 '마지막 부탁'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야 '빗나간 의심'을 풀고 진심으로 답한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꼭 그렇게 하자고.
이승철 keeprun @ nodong.org

 
이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