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을 앞두고 회사동료들과 사장님께

오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진용기, 조광한 동지가 당당하게 사내하청노조 조합원임을 드러내고 현장 안에서 공개적인 조합활동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멀리 있어서 가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동지들의 투쟁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진보넷 속보란에서 퍼온 편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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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순간을 앞두고 회사동료들과 사장님께


진용기 (세경기업)
조광한 (원호기업)



2004년 2월 22일 새벽 2시

이 편지를 전해받고 계실 시간 즈음이면 저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별일 아니겠지만 동료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가 폐업을 당할 수도 있는 크나큰 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동료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 만약 회사가 문을 닫는다면 엄청난 시련과 고통에 직면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결단을 선택한 것은 만약 박일수 열사의 죽음앞에 우리 하청노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다면 당장은 밥벌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만천하에 우리 스스로를 노예라고 선언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으로서 밥벌이도 중요하지만 아내와 자식들에게 떳떳한 가장, 자랑스런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접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우리 하청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이런 마음은 저 뿐만 아니라 우리 하청노동자들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동료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 또한 박일수 열사만큼은 아니더라도 하청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개선하고자 노력해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장님께 문제제기를 하고 맞서봤지만 우리 회사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모두의 현실인만큼 사장님이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심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작년말 일당삭감반대투쟁이후 한개 업체가 아니라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 모두가 뭉치기만 한다면 뭔가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기도 했지만 이또한 너무나 먼 미래의 꿈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일수 열사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가면서까지 이 답답한 현실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전 솔직히 그렇게까지 할 만큼 용감하지 못합니다. 그저 묵묵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습니다.

지난 토요일 박일수열사의 분신소식을 듣고도 저와 동료여러분들은 그저 묵묵히 일만 했습니다. 이런 자신이 얼마나 서글프고 원망스럽던지요. 저만 그런 것입니까? 만약 동료여러분들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 당장 기자회견하고 있을 저에게 전화해주십시오. 당장 집어치우겠습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 떠나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현중사내하청노동자들 모두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습니다. 다만 절망감에 싸여 말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할 뿐이라 믿습니다.

우리 하청노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동안 현중원청은 우리에게 노예가 되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인물과 업무회의를 빙자해 관리자들을 통해 갖가지 음해성 루머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우리의 마음을 많이 이해해주시는 사장님마저도 지난 목요일 조반장회의때 현중원청이 주장하는 음래성 루머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 사장님이 이럴 분이 아닌데 아닌데..."

중대한 결단을 앞두고 지금 저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갑니다. 나 하나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줄까? 나 하나 잘못되는 건 각오하겠지만 회사가 문닫고 그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이 쫓겨나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을까?

어제 저녁 박일수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대학병원 영안실에 다녀왔습니다. 하청노조위원장을 만나 저의 결심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영안실에 있던 민주파직영노조 조합원들과 하청노조 조합원들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결단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끝으로 이런 결단을 하면서 동료여러분들께 함께 상의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일당삭감반대투쟁직전 노동조합에 가입했지만 동료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 못한 현실이 너무나 야속하며 죄송할 뿐입니다.

오늘 저의 결단을 반드시 승리로 만들겠습니다. 기필코 참단한 우리의 현실을 박살내겠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문닫고 동료들이 쫓겨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저의 결단이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한다면 이 글을 유서로 대신하겠습니다.
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