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노동자의 힘 황정일
꿈의 제전이라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첫 동양인 진출은 일본의 노모 히데요. 그는 ‘꿈을 쫓는 사나이’로 불리웠다. 꿈을 상실한 노동대중은 스포츠스타의 그 꿈에 편승한다. 스포츠는 ‘각본없는 드라마’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그 순간의 예측 불허의 상황의 묘미는 상태적 박탈감에 젖어있는 대중들을 스포츠에 몰입하고 열광하게 한다. 스포츠는 인터넷사전에서 ‘경쟁과 유희성을 가진 신체운동 경기를 총칭하는 말’이라 하고 있다. 이 정의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경쟁으로서의 스포츠는 사회갈등의 축소판으로서의 스포츠이다. 1969년 월드컵 예선전 이른바 축구전쟁으로 3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엘살바드로와 온두라스간의 대립의 원인은 영토확장을 둘러싼 양국의 국경문제였다. 포틀랜드섬 영토문제가 지속되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와의 축구경기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스포츠는 이처럼 국가간 민족간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전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을 희석시킨다. 스포츠 종목의 수많은 규칙들은 노동계급의 역동적인 힘을 제도화시키는 하나의 상징이다. 경쟁으로서의 스포츠의 정점은 프로스포츠다. 한 다큐멘터리는 농구스타를 꿈꾸는 3명의 10대를 관찰하면서 미 흑인들에게는 팝스타 혹은 MBA 프로농구선수가 되는 것밖에 달리 성공할 길이 없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스포츠 세계 역시 소수 초국적자본의 세계지배처럼 소수 프로스포츠 스타가 지배한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스포츠인이 좌절이 잊혀지고 있다.
다른 하나 유희로서의 스포츠가 있다. 유희는 ‘즐겁게 놀이 운동을 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전두환 권력의 체제 정당성을 위한 프로스포츠의 탄생을 뒤집는 무언가가 있다. 유희로서의 스포츠인은 단순 소박하게 그저 즐기려고 한다. 여기에 힘이 있다. 그들은 프로와 대중을 결합시킨다. 호나우도의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몸놀림에 진정 감탄하면서도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이를 자신의 몸놀림의 발전과 연결시킨다. 비록 많은 격차가 있다손 치더라도… 스포츠 할 권리의 주장은 생존권에서 생활권으로 노동의 권리를 확장하는 투쟁과 연결된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자. 스포츠를 즐거운 놀이 운동으로 사랑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윤 추구와 부르주아 권력유지에 이용하려는 일체의 경향과 투쟁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포츠는 인간육체 몸놀림의 예술가(스포츠 스타)들의 고양된 실력을 감상하고 이를 대중스스로가 자기 주체화하는 무한의 발전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해방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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