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1월/만나고싶었습니다]”싸우는 데까지 싸워봐야죠”

일터기사

[만나고 싶었습니다]

“싸우는 데까지 싸워봐야죠”
– 풀무원 춘천공장 노동조합 박엄선 위원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준) 편집실 이민정

‘ 무재해달성 195일’차 회사에서 176일째 진행되고 있는 근골격계투쟁

풀무원 춘천공장은 아름다운 산등성이에 풍경화처럼 고즈넉이 위치해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무재해 350일 목표, 무재해 달성 195일’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넓게 퍼져있는 공장 서너 동의 벽에는 ‘생명을 담는 소중한 그릇’을 뜻하는 풀무원 로고가 박혀 있다. 그 중 한 건물 벽면에 걸린 플랑카드가 눈에 띄었다. “풀무원 노동자 다 죽이는 고소고발, 손배, 가압류 노동탄압 즉각 중단하라! ”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을 시작하고, 풀무원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 앞 1인 시위를 시작한 것은 176일이다.

“9월 이후로는 회사측에서 걸은 손배, 가압류 같은 고소고발들 때문에 경찰서나 법원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리고 있어요. 그저께는 새로 명예훼손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요.”
풀무원 춘천공장 노동조합 박엄선 위원장은 ‘회사측은 노동조합과 근골격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노동조합과 조합원 개인에게 각종 법적 소송을 거는 것에 열심’이라고 8개월째로 접어든 근골격계투쟁 상황을 일러준다.

돌팔이 한의사 노릇하며 노동조합 조직해

박엄선 위원장이 풀무원 춘천공장에 입사한 것은 95년 11월 1일. 그 당시에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는 남성노동자라 해도 60만원을 겨우 버는 상황이었다.
“비정규직은 선거나 민방위, 예비군 훈련으로 빠져도 근무로 인정 안 해줬어요. 당시에 비정규직이 57%정도 됐거든요. 일주일, 한 달을 근무해도 주차, 월차도 없었고요. 현장통제도 심해서 출퇴근시간은 물론 밥먹는 시간까지 엄격하게 통제했었어요.”
이러한 상황속에서, ‘머리띠 매고 투쟁가 부르는 건 한번도 못 본 사람들’과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월차, 시급 계산방법을 정규직도 전혀 몰랐죠. 취업규칙을 상시적으로 게시해야 하는 것도 지켜지지 않았고. 현장통제가 완벽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건설하는데 굉장히 힘들었죠.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 것’이라고 해도 ‘한 번 해봐라, 안 될 거다’라는 반응이었어요. 오히려 표면적인 방해보다는 현장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죠.”
회사측의 탄압보다는 조합원 조직이 더 큰 과제로 다가왔던 박엄선 위원장이 택했던 것은 현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처음에 근로기준법 설명을 해서 호감을 받았는데 노동법 자체가 대개 딱딱하잖아요. 하기 싫고 두 번 들으면 또 짜증나고 하니깐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 관심을 모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감했죠. 그래서 서점에서 <생약초본>이라는 책을 사서 그걸 보고 돌팔이 한의사 노릇을 좀 했죠. 그게 적중할 때도 있었고, 돌팔이 허준같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한두 사람씩 모이고 신뢰가 싹튼 것 같고, 전원이 다 조합에 가입하는 성과를 낳았죠.”
그렇게 노동조합을 설립한 것이 2000년 8월 29일. 풀무원 전체가 ‘노조는 안된다’는 체념에 빠져 있을 때 노동조합 설립신고 인증이 났을 때 박위원장은 볼을 꼬집어 볼만큼, 눈물이 날만큼 좋았다고 한다.

11차례 교육하며 근골격계 투쟁 준비해

풀무원 춘천공장 노동조합은 처음 공약을 하나씩 실현시켜나갔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생활임금에 가까운 임금인상, 직장 민주화 등을 걸고 회사와 싸워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화했고, 다닥다닥 붙어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카메라를 떼냈다. 근골격계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은 조합원들이 어깨, 팔이 아파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부터.
“근처 병원을 갔더니 풀무원 들어온 지 2년 정도 된 우리 조합원 동지가 어깨가 아파서 약물치료, 물리치료 받으면서 다닌다는 거예요. 그래서 조사했더니 아픈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회사측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임시건강진단을 하자고 작년 6월부터 얘기했죠. 그런데 회사에서 한다는 소리가 ‘근골격계란 건 스트레칭하면 낫는다, 약이 없다’예요. 그런 식으로 해서 근 6개월을 끌어왔죠.”

딱히 대책도 나오지 않고 회사에서 시간을 끌면서 현장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조합원들은 근골격계라는 단어조차 발음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잘 몰랐고, 현장에서 일을 하니깐 당연히 아픈 거라고 생각하는 때였죠. 그래서 근골격계 교육을 10월부터 12월까지 아마 간부교육까지 합쳐서 11차례 정도 진행했어요. 조합원들도 하나둘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 알아가고 검진결과 나오고나서 집단요양투쟁에 들어간 거죠.”

지금까지 잃은 것보다는 얻은게 더 많아

처음 집단요양을 들어갈 때는 ‘혹시 내가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닌가’라고 걱정하던 조합원들은 투쟁을 진행하면서 변해갔다. 치료받으면서 ‘그냥 우습게 넘길 병이 아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고질적으로 앓을 병이다’는 생각을 굳혀간 것이다.

조합원들은 박위원장이 지칠 때 다시 힘내고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위원장은 힘들 때 조합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근골격계를 이야기하고, 집회에 참석하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서로에게 심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당장 조합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투쟁은 이번 뿐 아니라 다음에도 할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러나 처음에 투쟁의 틀을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그 다음에 투쟁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싸우는 데까지 싸워봐야죠. 올 해 안에는 끝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장기투쟁하면서 우리가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더 많지 않나 라고 생각해요.”

길었던 투쟁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박위원장은 처음 근골격계투쟁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더욱 갈고 닦고 있었다. 그런 박위원장의 모습을 보면서 풀무원 근골격계투쟁이 다시 한 번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16일터기사

댓글

댓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정보통신 운영규정을 따릅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