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한라공조 노동조합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황운하 편집위원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편집실 박지선
“전 욕심이 많아요. 그렇다고 뭐든 끝을 보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것저것 다 해보고는 싶거든요.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렇거든요. 남들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냐…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 남들도 현장통제 분쇄투쟁 다 하고, 정규직화 투쟁 다 하는데…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남들 인라인스케이트 탄다고 하면 나도 한 번 타봐야 되고, 남들 이 노래 좋다고 하면 나도 외워서 불러봐야 되고… 저는 그래요.”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항상 바쁘고 항상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다’고 한다. 사람 좋고, 입담 좋아 한 번쯤은 소줏잔을 앞에 두고 질퍽하게 같이 취해보고 싶은 동지. 그가 바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라공조 노동조합 황운하 동지이다.
“이거 미친 짓이다”
96년도 한라공조에 입사했을 당시부터 그는 선봉대, 소의원, 실천단 등으로 활동을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투쟁을 꼽으라 하면 제일 먼저 한라공조 노조원들이 단결력과 투쟁력으로 똘똘 뭉쳤던 노개투 투쟁을 꼽을 정도로 선봉대 활동도 가열차게 가져왔다. 그러다가 근골격계 투쟁을 알게 된 것은 2002년 노동안전국장을 맡으면서부터.
“작년 5월에 처음 근골격계 투쟁을 접했을 때에는 ‘이거 미친 짓이다’라고 생각을 했죠. 과연 이게 될까… 한라공조도 2000년, 2001년만 해도, 산재불승인자만 15명이나 됐고, 그 분들이 산재 불승인 받은 이유가 다 퇴행성, 작업과의 연관성이 없음으로 해서 그런 거였기 때문에 이 분들과 함께 근골격계 투쟁을 한다는 것은 진짜 너무 어려운 일이고, 손해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산재요양 들어가시는 분들의 강한 의지, 그리고 근로복지공단과 사측과의 투쟁 전개를 그 분들이 너무 잘 해 주셨어요.”
미친 짓이라 느낄 정도로 막막하기만 했던 근골격계 투쟁에 대해 황운하 동지는 이제 ‘긴장감과 스릴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삶의 순간들 중에 가장 기뻤던 때 역시 1차 승인이 났던 작년 여름을 꼽는다. “원래 승인이 8월 16일 오전 중에 내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날 오전 중으로 승인이 안 났어요. 그래서 환자들하고 근로복지공단 가서 그 안에서 싸우고, 그 안에서 막 승인 안 나면 우리 한 발도 안나가겠다… 그렇게 해서 1시간 만에 전원 승인 통보서 받았을 때. 그 승인 통보서 받을 때가 진짜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에게 근골격계 투쟁이 가지는 진짜 의미는, 그가 하나하나 조합원을 만나가면서 집단요양을 조직하고, 투쟁하는 과정에 있서 본인의 할 수 있는 경험을 거의 다 했다는 데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점도 있기 마련이다.
“근골격계 투쟁이 노동강도강화저지 투쟁으로 처음부터 방향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거를 못했어요. 그리고 현장의 조합원들의 열기를 끌어내서 한 번 제대로 자본과 붙어봤어야 한다는 게 제일 아쉬워요. 앞으로 투쟁한다는 사업장이 있으면, 그런 쪽에 대한 고민들을 살렸으면 좋겠구요.”
절대 비타협적이고, 가장 원칙적이게!
“한노보연은 절대 비타협적인, 그리고 우리가 원한 원칙들, 현장성, 계급성, 전문성을 두루 겸비해서, 지금 이 자본이 흔히 취하고 있는 노사협조주의,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 건강권을 외면하는, 그런 식의 투쟁은 안 했으면 합니다.” 그의 단호한 어조는, 단순한 바램을 넘어, 앞으로 연구소와, <일터>와 올곧게 함께 할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저는 처음에 일터 매체 얘기 들었을 때 걱정 많이 했어요. 과연 글들이 형성이 될까… 그리고 노동건강권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고민이 다를 수 있다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쭉 매체를 보면서 생각한 거는, ‘아 고민은 하나인데, 그걸 총화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일터가 꾸준히 발전하면은, 전국적으로 총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학적인 기본지식으로 현장투쟁의 전문성을 공유하고 총화해낼 수 있는 잡지였으면 좋겠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전국동지들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항상 구호로만 외치는 것, 그거 해보는 게 제 꿈이에요”
그는 요즘 계속되는 열사들의 자결투쟁과 끊임없는 현장탄압으로 살아온 이래 지금이 가장 어렵고 괴롭다고 한다. 원래 눈물이 많아 한 번 울면 두 시간씩 울고, 개인적으로 만나면은 싱거울 정도로 말수 적고 소심한데, 지금의 시국은 더더욱 그를 암울하게 한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을 옳다고 이야기해 주며, 항상 곁에서 힘이 되는 가족들, 그리고 투쟁을 엄호하고 지지하는 수많은 전국의 동지들이 있기에 그의 투쟁은 더더욱 치열해야만 한다.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고, 이제 셋째가 조금 있으면 이 암울한 세상을 보러 나올 건데, 자식들에게 떳떳하고 건강한… 나쁜 짓 안하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아비된 도리로 해야 될 일인데… 아비된 도리로 못한다 하면은, 자식들이 좀 바꿔주었으면 좋겠구요. 동지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마음이 많구요. 연대합시다. 연대해서, 열사정신 계승, 노동탄압 박살… 그런 거 한 번 진짜로 해봤으면 좋겠어요. 항상 구호로는 외치는데… 그거 해보는 게 제 꿈이에요. 동지들도 너무 기계적으로 만나지 말고, 사는 얘기도 하고, 가정 얘기도 하고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동지로서 만나서 동지로서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얘기도 하고… 연대투쟁할 때는 또 연대투쟁하고, 부술 때는 또 한 번 부수고. 그렇게 투쟁의 선 상에서, 생활의 선 상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욕심 많다는 그에게, 앞으로 죽기 전에 성취하고 싶은 세 가지를 물었다. 첫째로,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다 했고, 둘째로는 내가 못챙길 바에는 가족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했고, 마지막으로는, ‘빨리 이놈의 노동해방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면상 담지 못했던 모든 이야기와 감상들의 아쉬움까지 보태어, 2004년이 황운하 동지와 같은 소박하고 풋풋한 이들의 소원에 한 걸음 다가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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