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노동강도강화저지와 현장투쟁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연대 김정곤 공동대표 인터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준) 편집실 이민정
노동재해 현장의 싸움꾼들이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을 시작하고,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노동강도강화저지와 현장투쟁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연대(이하 전국노동자연대)’이다. 이 과정에서 연구단체, 현장조직 등을 대표할 사람이 필요했고 김정곤 대표(43세)는 자연스럽게 현장조직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노동재해로 시작된 대우조선 생활
전국노동자연대 김정곤 대표는 울산현대중공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있다가 84년 대우조선 전기의장부에 정규직으로 입사해 2년만인 86년 1월 3일 노동재해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20여년 대우조선 생활은 노동재해로 시작된 것이다. 88년 김 대표는 노동재해를 당한 노동자와 함께 대우조선 산재보우회를 결성해 노동보건투쟁에 나서게 된다. 노사협의회장을 점거하고 인공으로 박은 의안을 빼내고, 다친 부위를 보여주는 신체정원대 투쟁을 하던 김정곤 대표는 90년 대우조선에 민주노조가 들어서자 산업안전부장이 되어 다양한 투쟁을 벌여낸다.
“처음에는 사고성 중대재해가 너무 많이 터져서 근무시간에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사고난 장소에서 노동자장을 지내는 투쟁을 했죠. 그러다가 94년에는 회사의 건강검진이 워낙 엉터리여서 소음성 난청과 진폐증 검진을 조사해보니깐 엉터리 검진이었던 것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더군요.”
김 대표는 당시 엉터리 건강검진을 막기 위해 조합간부들과 함께 목에는 쇠사슬을 매고 검진장소를 막았다. 이 투쟁은 조합원의 엄청난 호응을 받아 결국 노조가 건강검진 감사권을 따내는데 이르렀다. 96년에는 ‘법전’에만 형식적으로 있던 작업중지권을 금속산업연맹 요구안으로 내걸고 싸워 쟁취하게 되었다. 당시 경총 등 자본가단체와 정권은 생방송과 9시 뉴스까지 총동원해가며 ‘인사경영권 침해’라고 난리였지만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만드는 것이 인사경영권이라면 노동자는 당연히 침해해야 된다’는 대우조선 노동자의 투쟁 앞에서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산안 김정곤이 위원장 김정곤으로
대우조선에서는 ‘산안 김정곤’으로 굳혀진 김대표가 노조 위원장 선거에 나간 것은 2000년이었다.
“위원장 선거 나갔을 때 이름은 못 밝히고 후원금을 준 조합원이 많이 있었어요, 회사에 찍힐까봐 악수할 때 몰래 주머니에 있던 땀에 절은 꼬깃꼬깃한 돈 몇 만원씩 손에 꽉 쥐어주는 일도 많았죠.”
당선은 기대하지 않았던 김대표의 유인물에는 “대우조선 노조 위원장 선거는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는 폭로부터 “김정곤과 현민추를 지지한다는 것은 앞으로 함께 투쟁하겠다는 약속”이라는 투쟁결의까지 대우조선 노동자 대부분이 가슴에 품고 있던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선거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가 그대로 보이는 대의원선거에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조합원들이 위원장 선거에서 ‘산안 김정곤’을 위원장으로 만든 것이다. 한시도 쉴 틈 없이 현장을 돌며 조합원들과 만났던 김정곤의 손에 조합원들이 쥐어준 것은 꼬깃꼬깃한 돈만이 아니라 현장통제로 꼬깃꼬깃해진 조합원들의 바램이기도 했다. 대규모 노조에서 30여 명도 안 되는 조직원으로 선거를 치러 70% 이상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미 노조 산안부장 시절 집행부가 마다하면 조합원과 함께 나서 싸웠던 모습을 기억하던 대우조선 형님․아우들이 김정곤을 위원장으로 만든 것이다.
선거 직전까지도 감금과 테러까지 당하면서 하청업체 노동자의 투쟁에 함께했던 터라 위원장이 되자 업체 사장들이 직접 조합에 올라와 항의하는 일도 많아졌고, 현장 관리감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본은 ‘빨갱이’ 운운하며 격렬하고 노골적으로 김정곤 집행부를 공격했지만 대우조선 현장의 새로운 움직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오던 날 옥포매립지에 모인 조합원 76명
김대표가 위원장이 된 이후 대우조선 조합원들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위원장을 현장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얼굴 보기 힘들던 대우조선 위원장이 현장을 직접 돌며 조합원과 만나 이야기하고 현장의 문제점을 찾고,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근골격계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9대 김정곤 집행부의 주요 슬로건이 ‘죽음의 현장, 절망의 공장을 희망의 공장으로,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현장건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과정이기도 했다. 온몸이 쑤셔와도 아프다는 말 한 마디 못 해본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골격계 조사를 했고, 그 결과 248명의 근골격계 환자를 찾아냈다. 하지만 회사의 회유와 협박은 상상을 초월했고, 함께 해야 할 노조 집행간부들조차 ‘이게 중요한 문제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 사업으로 열심히 교육하고 조직해 대우조선의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이 그 포문을 열 수 있었다.
“회사 통제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싶었는데 비도 내리던 날 옥포 매립지에 나이든 조합원 76명이 모였을 때 울었어요.”
김 대표는 집단요양투쟁을 시작하던 날을 회상하면 지금까지도 그 감동이 생생히 떠오르곤 한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 접수할 때 얼굴도 못 봤던 조합원들이 ‘공단 지사장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해서 지사장을 데리고 나왔어요. 근로복지공단 지사장이란 사람이 회사편만 드는 걸 보던 조합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걸 보면서 이거다 싶었죠. 현장에 활동가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투쟁 속에서 만들어내면 되는 거거든요”
이렇게 시작된 대우조선의 근골격계 투쟁은 구사대 6백 명을 동원한 4.4 인력부 폭력사건, 서울본사 상경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김 대표는 이 과정에서 기자회견 직후 긴급 체포되어 또 한 번의 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국정감사장 진입투쟁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투쟁이었지만, 그만큼 아쉬운 부분도 많다.
“워낙 회사의 회유, 협박이 심해 처음 요양에 들어간 76명을 병원별로 입원시키고 조직했는데, 집행부가 구속되는 바람에 이후에 제대로 챙기질 못했죠. 그리고 근골격계 투쟁이 진행되면서 불법파견은 막았지만 인력부족으로 충원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죠.” 요양중인 노동자들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조기 퇴원하도록 종용했던 것은 대우조선의 회유․협박 사례 중 하나이다.
옥살이를 끝내고 현장에 돌아온 김대표를 맞은 건 역시나 “미안했다, 고생했다”고 등 두들겨주는 현장 동료들이었다. 그 중 몇몇은 “굽힐 줄도 알아야지”라며 애써 미안한 기색을 감추려하기도 했다.
“근골격계 싸움으로 현장을 조직해내야“
이제 현장에서 용접일을 하고 있는 김대표는 “근골격계 조사사업을 진행하는 건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은 정규직 노동자들이겠지만, 그것도 못하고 있는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고 몸도 더 많이 망가졌을 거에요. 유일하게 신자유주의를 박살낼 대안을 가진 투쟁인데, 운동진영 내에서도 아직까지 노동보건이 주요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했죠. 아직까지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고, 거기에는 제 잘못도 있죠.”라며 아직까지 근골격계 투쟁이 몇몇 부서만의 문제로 국한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근골격계 싸움으로 현장을 조직해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는 김대표는 “대우조선도 선행도장부 임시건강검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전사업장의 정규직,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노조가 주도권을 지니는 검진투쟁으로 가야한다”며 지금도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거제도 옥포만 150만평에 위치한 대우조선의 견고한 성에 파열구를 내는 투쟁의 현장마다 빼놓지 않고 만날 수 있던 김정곤을 다시 만나는 곳은, 아마 또 다른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곳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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