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월/만나고싶었습니다]”한 사람이 남아도 열사의 유언대로 해나갈 것입니다.”

일터기사

[만나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이 남아도 열사의 유언대로 해나갈 것입니다.”
– 세원테크지회 조합원과 가족대책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편집실장 이민정

(intro)
구사대의 폭력에 두개골이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힘든 투병생활을 해오던 충남 세원테크지회 이현중 열사가 지난 8월 26일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10월 23일 분신, 병상에서도 ‘투쟁은 어떻게 되어갑니까’라며 걱정하던 이해남 지회장이 11월 17일 결국 이현중 열사의 뒤를 이어 열사가 되었다. 25명의 조합원 중 노조탄압으로 한 명이 사망했고, 노조탄압에 항거해 한 명이 분신했고, 투쟁하던 조합원 3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남은 조합원과 가족들이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투쟁하고 있다. <일터>는 지난 11월 26일 전국노동자대회가 진행된 대구 세원정공 앞에서 그들을 만나보았다.

“민주노조 사수 결의로 다 감수하고 갑니다”

전경들이 까맣게 수놓고 있는 세원정공 앞마당은 양쪽에 날을 세운 철조망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합판으로 유리창까지 막아놓은 세원정공은 이 와중에도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철조망 쳐진 담벼락을 따라 나지막이 있는 농성천막 앞에서 세원테크지회 구재보 사무장(31세)을 만났다. 여기저기 점검을 하고, 회의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지난 투쟁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저희 같은 경우는 근속기간 1년 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동료들하고 같이 터놓고 이야기하고 이런 인간적인 관계들이 있으면 일이 힘들어도 버텨낼 수 있을 텐데. 일단 한 명이 입사를 하면 현장에서 ‘쟤는 한 달짜리, 일주일짜리, 한 시간짜리’이런 식으로 내기까지 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깐 주변사람들이 저는 일주일짜리였다고 하대요.”

시급 2,050원을 받던 세원테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 회사는 숨 쉴 틈도 없이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싸워 그 해 12월 12일 충남지역 연대파업까지 끌어낸 세원테크지회는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투쟁을 해왔다.

“힘들죠. 당연히 힘들고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힘들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간 조합원들도 있고요. 또 회사 노조파괴공작 때문에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엄청 많고요.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민주노조 사수의 결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 감수하고 가는 겁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작은 집으로 옮겨가고, 차압 딱지 붙고, 신용불량 걸려도 가는 거죠.”

“아저씨도 저희를 보고 투쟁하고, 저희도 아저씨를 보고 투쟁하는 거죠”

적은 인원이지만 조합원들의 나이대도 다양하다. 한 가정의 아버지인 40대부터 젊디젊은 20대 초반까지. 항상 집회현장에서 투쟁하는 아저씨들과 놀다보니 투쟁가를 부르는 것도 자연스럽고, 한창 집회를 진행 중인 무대단상 위에서 뛰노는 것도 자연스러운 가족대책위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신승현(21세)씨는 이중 막내뻘이 될 법했다.

“여름에는 온도가 45도까지 올라가고, 온몸에 땀띠가 나죠. 환풍기가 있다고 하는데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도 수돗물을 떠다 마셨어요. 작년에는 공고 실습생들이 구사대 역할을 했어요. 현장에서 맞고 나간 애들도 있어요. 출근 시간 20분만 지나면 반장들이 기숙사 문을 발로 뻥 차면서 욕하고 들어와요. 잔업 안 한다고 하면 회사 나가라고 그러고.”

그 역시 19살의 나이에 공고실습생으로 세원테크에 들어왔던지라 공고실습생들이 세원테크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해준다. 어린 나이에 계속되는 투쟁이 힘들 법도 한데 신승현씨 역시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조합원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축구도 하고, 저희는 40대 아저씨랑 장난도 쳐요. 아저씨도 저희를 보고 투쟁하고, 저희도 아저씨를 보고 투쟁하는 거죠.”

“우리 현중이가 감기도 한 번 안 앓았어.”

백발이 성성한 이현중 열사의 아버님(68세)은 “우리 현중이가 감기도 한번 안 앓았어.”라며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저기 있는 경찰놈들이 쌔리 호통을 쳐도 꿈쩍도 안 해. 이놈아 김문기는 노동청 왔다가 도망이나 치고. 그 나쁜 놈이 무릎도 꿇고 죄를 지었다고 하고 즈그가 해결해야 할 것을. 사람을 냉동관에 100일이라는 시간을 눕혀놓고. 이놈의 새끼는 인간도 아니고, 부모새끼도 없는 인간이야.”

먼저 보낸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는 세원정공 안을 지키고 있는 전경들을, 이현중 열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병원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전경들을 항상 호되게 꾸짖는다. 하지만 먼저 보낸 아들뻘쯤 될 전경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꿈쩍도 안하고 세원정공을 지키고 있었다.

이현중 열사의 매형인 강우성씨는 ‘이현중’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투쟁조끼를 입고 있다. 기나긴 투쟁의 세월만큼 여러 구호가 적힌 뺏지들로 가득한 이현중 열사의 투쟁조끼를 강우성씨가 입은 것은 이해남 열사의 분신소식을 들었던 그 날이었다.

“분신한 날도 회사랑 협상하면서 ‘구속자 3명 풀어줘라, 파업했던 거 유급처리해라’면서 보상 문제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협상 끝나고 술 먹고 있는데 분신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이 조끼를 입고 투쟁에 나섰어요.”

강우성씨는 구속된 조합원들을 보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제일로 아픈 부분이 그 부분이에요. 살아 계셔 가지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집회를 모두 마치고 다시 유족들을 챙겨 병원으로 돌아가던 강우성씨는 “길어져도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죠.”라고 다시 한 번 투쟁 결의를 밝히고 돌아갔다.

한 가족대책위 동지의 말이 대구를 떠날 때까지 귓전을 맴돌았다.

“부탁하지 않습니다. 세원의 싸움은 전국의 싸움입니다. 단협, 임금 많이 땄다고 열사의 한을 푸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거 바라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폭력 쓰지 말고, 어린 조반장들이 나이든 형님에게 반말하지 않는 것을 바랍니다. 한 사람이 남아도 열사의 유언대로 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주)
세원테크지회는 12월 10일 회사측의 공개사과, 노조탄압중단, 해고자복직 등에 합의했습니다. 이해남·이현중 열사의 장례식은 12월 12일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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