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월] 자유로운 경쟁사회 – 빼앗을 권리, 도태될 자유

일터기사

[세상사는 이야기]

자유로운 경쟁사회
– 빼앗을 권리, 도태될 자유

충청지역 노동건강 협의회(준) 송관욱

큰아이가 어느덧 내년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 무릎에 올라앉아 같은 이야기책을 질리지도 않는지 수도 없이 되풀이 읽어달라고 보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학생이 되어 학기말이면 시험도 본다. 초등학생이 무슨 시험공부가 필요하냐며 문제집도 한 권 없이 학교에서 나눠주는 학습지만 풀어보라고 시켰는데, 막상 시험 전날이 되니 왠지 성적에 신경이 쓰인다. 할 수 없이 아빠로서가 아닌 시험제도의 선배로서 실수투성이 아이를 앉혀놓고 시험요령을 가르친다. (1) 제일 먼저 번호와 이름을 쓸 것. (2) 맞는 것을 고르는 문제인지 틀린 것을 고르는 문제인지 꼭 확인할 것. (3) 수학 연산문제는 암산으로 풀지 말고 시험지 여백에 직접 써가며 풀 것. (4) 숫자는 혼동되지 않도록 또박또박 쓸 것. (5) ‘모두 고르시오’는 답이 두개 이상임. 기타 등등…

집단교육과 평가제도는 불가분의 관계인 듯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어색하다. 저마다의 소우주를 간직한 아이들을 ‘의무적’으로 모아놓고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까지는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현실적 한계이겠거니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분명 집단에 대한 훼방일 뿐이다. 학년이 올라가며 그러한 상대평가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학업의 목표가 ‘배움’이 아닌 ‘성적’으로 전도됨은 당연하다. 어찌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과정이란 경쟁사회에 걸맞도록 경쟁기술을 교육하는 과정인 것도 같다.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력은 학교 밖에서 더욱 치열하다. 부모들은 남들에게 뒤질 새라 자녀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과도한 사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더 늦게 퇴근을 하며, 부모가 함께하지 못하는 그 시간에 아이는 또 다른 학원을 찾는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와 예능과 스포츠에 모두 만능이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의 반사면에는 소위 ‘아이비리그 출신의 풋볼 스타’와 같은 동화적 환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환상은 실현가능한 것일까? 권력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스포츠, 교양까지 독점한 그 선택받은 계급의 아름다움을 진정 본받고 따라야 할 우리의 이웃이라 생각했다면, 정작 과외공부가 필요한 이들은 바로 부모들이 아닐까?

경쟁사회에는 경쟁의 자유가 있다고 믿는 환상이 이들을 과외지옥, 입시지옥에 몰아넣는지도 모른다. 물러서면 도태된다는 강박감과, 왠지 어려서부터 신동처럼 보였던 내 아이의 장래가 지금의 고난 너머에 있을 것이라는 자유로운 착각. 그러나 같은 사교육이라도 차원이 다르다. 지배자 교육에 필요한 사교육과, 우수한 노동력으로 길러지는 사교육은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능력이 인정받는 사회. 그러나 권모술수와 폭력과 야합과 거짓마저 능력으로 인정되는 사회. 자유가 있는 사회.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고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으며, 그리하여 어느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회. 배달호, 박동준, 김주익, 이해남, 이용석, 곽재규가 살았던 나라. 자유경쟁사회,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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