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1월] 안정과 평범의 마취약을 거부하다

일터기사

[일터이야기]

안정과 평범의 마취약을 거부하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편집위원 허 경

(intro)
어렸을 적 가장 싫은 것 중 하나가 가루약이었다. 입안 가득 쓴맛은 물을 아무리 마셔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먹다가 자칫 목에라도 걸렸다간… 가루약을 먹는 일은 끔찍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지만 어쨌든 가루약은 싫다. 가루약을 먹는 일은 어른이 된 지금도 싫다. 이번 일터이야기 취재 후에 난 가루약이 더 싫어졌다.
게으른 나를 위해 편집실 동지들이 섭외해준 일터는 약국이었다. 그런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활동하는 분에게 전화해 보란다. ‘이상하네… 불량필진인 나를 응징하는 건가?’
“여보세요. 전광희동지시죠? 한국노동이론… 아니아니,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편집위원 허경이라고 합니다.”
“…네. 그럼요… 저녁 일곱시 이후에 응급실 옆 약제부로 오시면 됩니다. 그 때쯤이면 정규직들이 다 퇴근하거든요.”
그랬다. 전광희동지는 한 대학병원 약제부에서 일주일에 하루 야간약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번 일터이야기는 비정규직 약국노동자의 일터에 대한 것이다.
‘그랬다. 편집실 동지들은 아직 날 버리지 않았다…’

병원은 평촌의 아파트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진료시간은 끝이 나서인지 1층 로비엔 불이 꺼져 있고 응급실과 그 옆 약제부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앉았고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약봉투를 들고, 서류뭉치를 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다 겨우 자리에 앉은 전광희동지와 수많은 약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광희동지가 일하는 대학병원의 약제부에서는 원내처방사유가 되는 외래진료환자와 입원환자에 대한 약, 주사 등을 조제하고 원외처방전을 발행하고 응급실 환자에 대한 조제를 한다. 병동의 입원환자와 응급실의 환자는 시간을 가리지 않으므로 병원의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24시간 근무를 해야 한다. 그래서 약제부에도 주간약사와 야간약사가 있다. 13명 주간약사는 모두 정규직이고 4명의 야간약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일주일에 한 번 오후5시 30분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15시간 정도를 일하는 비정규 야간약사인 전광희동지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에는 ‘약사 이oo’라고 쓰여 있었다.
“비정규직한테는 가운도 안 주던데요. 힘있는 노조가 있는 병원은 야간약사도 정규직으로 뽑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비정규직이죠. 저처럼 약사자격증을 가지고 다른 활동을 하는 사람이나, 대학원 공부를 하는 사람, 그리고 악착같이 돈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돈 드는 정규직을 뽑으려고 안 하죠.”

“원래 야간약사를 고용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신고해야 하는데, 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않기 때문에 신고도 안 해요. 또 일이 힘들어서 1년 이상 하는 사람도 없어서…”
지금은 일주일에 하루 일하는 것뿐이지만 전광희동지는 한 대학병원에서 1년 동안 정규직 야간약사를 한 현장경험(?)과 약국노조준비위원회 활동의 경험이 있어 약국노동자에 대한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약 봉투 뽑기, 병동입원환자 주사, 약 조제하고 전산입력하기, 응급실환자 약 조제하고 복약 지도하기, 감사(정확한 조제를 확인하는 일), 마약류 별도관리하기, 쉬지 않고 울어대는 전화 받기…”
넓은 사무실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다양한 일들을 해내야 하는 약사, 게다가 야간약사. ‘건강을 해치지 않는 야간노동은 없다!’ 또 복습하게 된다.

약 봉투를 찢느라고, 시럽(물약)을 작은 통에 옮겨 담느라고, 전산입력을 위해 자판을 두드리느라고, 오른손 중심인 갖가지 기계를 조작하느라고 새벽쯤 되면,
“…오른쪽이 마비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약사들이 비염하고 피부병이 많아요.”
비염? 피부병?
“이곳은 분진이 아주 많은 현장이에요. 알약을 계속 가루로 만들어야 되거든요. 건설현장의 수준은 될 걸요. 게다가 약은 흡수가 잘 되게 만들었잖아요. 그냥 먼지하곤 다르죠. 그나마 괜찮은 곳은 기계가 약을 갈지만 필터관리를 잘 안 해주면 별 효과가 없죠. 그래서 약사들이 비염도 많고 손 같은 곳에 피부병도 많아요. 약 가느라고 손목 아픈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가.루.약.
“야간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의 80%이상이 아이들이잖아요? 근데 아이들은 다 가루약이죠.”
난 가루약이 싫다.

전광희동지는 현재 한국노동안전, 아니아니,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편집출판위원회에서 활동을 한다. 또 노동문화의 연구와 기획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있어, 인천노동문화제 같은 문화예술제를 함께 기획하기도 했다. 잠깐 언급했지만 약국노조준비위원회 활동을 했던 약사이기도 하다. 다양하기도 하다. 해서, 물었다.
“아니, 어쩌다가….?”
“학교 때 공부는 별로 열심히 안 했고…^^ 학생회 할동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잖아요. 사람들 만나면서 다양한 고민들을 같이 이야기하고 논쟁하고 때론 설득하기도 하는데, 그런 소통의 경로를 만드는 방법이 풍성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집회도 그런 소통의 방법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 참 재미없다는 생각도 했구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재미있는 집회, 소통의 경로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거죠.”
“아니, 그럼 약국노조는 어쩌다가…?”
“2001년 2월에 약국노조준비 소모임으로 시작했는데 저는 2003년 3월부터 결합했어요. 약국도 사업장으로 바라보자는 최초의 시도라는 데에 의미가 있죠.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임금과 후생복지 같은 근무조건이나 고용형태, 노동환경 등도 조사하고 상담도 했어요. 조사해보니 퇴직금도 없고 근로계약서 작성비율은 6% 정도 밖에 안 되고 4대 보험, 연월차, 생리휴가 같은 것도 전혀 보장 안 되고 있었어요. 근로기준법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상태지요.”
“사업장 앞에서 집회도 했었어요.”
엥? 사업장 앞이면 약국 앞에서 집회를?
“네, 약국 앞에서 집회도 했어요. 성북구에 있는 약국이었는데 체불임금하고 부당해고에 대해 공문도 직접 보내고 2번 정도 집회를 했더니 사업주가 요구를 다 들어줬지요.”
‘승리의 추억’도 있는 약국노조준비위원회 활동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지금은 침체기에 있다고 한다.

‘딩동’
얘기 중에 울리는 초인종 같은 소리는 야간약사를 부르는 소리, 또 약봉지를 들고, 서류뭉치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한다.
“야간에 재밌는 일은 없나요?”
몸 축나는 야간노동에 ‘재밌는 일’이 웬 말인가! 질문해 놓고 뜨끔했지만…
“친구 따라 응급실에 온 사람 중에 여기 와서 ‘타이레놀 좀 파시면 안 되요?’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원래 팔면 안 되지만 나이 드신 분들한테는 그냥 드린 적도 있어요.^^”
“야간이면 응급실에 아이들이 많이 온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애기 엄마들을 많이 보는데, 보험카드 보면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78****, 77**** 이런 사람들이 많거든요. 나보다 어리고, 또 내 또래인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렇게 살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요.”

딩동!
또 휙휙 뛰어다니는 동안 난 질문을 생각했다.
“그럼 전광희동지는 어디를 보고 사세요?”
“…점점 하늘만…”
“…”
“…혁명?… 근데 이런 건 쓰면 안 되는 거잖아요?”

따르르릉 따르르릉!
이번엔 전화다. 전광희동지가 전화를 받으며 뭔가 열심히 적는 동안, 난 주위를 둘러 봤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약들이 진열장에 쌓여 있었다. 한쪽 구석 진열장에는 ‘마취약’이라는 라벨이 붙어있었다. 병원으로 오면서 보았던, 잘 구획된 주거형 신도시의 아파트 숲과 밀집된 상가들이 떠올랐다. 마취약을 보고 왜 그것들이 떠올랐는지, 내 사고의 흐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안정적인 생활’과 ‘평범한 생활’이 일종의 ‘마취약’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소박한 상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노동문화예술기획자를 꿈꾸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녀에게 마취약을 투여하려는 세상의 시도는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 ‘마취약’을 투약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드는 경제적 양극화시대인 걸 생각한다면 그것이 ‘하늘’이든 ‘혁명’이든, 결국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보는 것을 함께 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내 생각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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