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2월] 뜨거운 전통의 멕시코, 투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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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전통의 멕시코, 투쟁은 계속된다
미디어참세상 윤태곤

멕시코의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1883-1949).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인 오로스코는 리베라, 시케이로스와 함께 마술적 리얼리즘과 민중의 생활을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렸다. 80년대 한국의 벽화운동, 걸개그림 운동들도 이들에게 뿌리를 대고 있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시작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밀리오 사파타와 판쵸 비야의 혁명 이후, 오브레곤의 혁명정부는 사파타의 농업개혁을 받아들였고 1917년 혁명헌법을 통해 국토와 지하자원이 국가소유임을 명확히 해 미국의 간섭을 거부했다. 혁명을 마무리지은 오브레곤 정권은 작가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종합 국가 교육안을 실행해 문맹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교사들을 시골로 하방시켰다. 그러나 교사들은 살해, 폭력에 시달렸다. 농부들이 교육받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대농장주들의 짓이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계속 시골로 향했고, 국가 또한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가 바로 벽화 지원 계획으로,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화가들에게 공간과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이후 오로스코, 리베라와 시케이로스는 벽화운동을 이끌어 민중들을 자극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 왜 오늘날에도 사파타의 후예인 사파티스타들이 치아파스에서 투쟁하고 있을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역시 여기에도 적용된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1927년 제도혁명당을 창당했다. 제도혁명당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불리는데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70여 년을 장기집권 해버렸다. 제도혁명당의 존재는 모든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의 부상을 막았고 제도혁명당 지도부는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대농장주와 미국과 앞으로는 싸우면서 뒤로는 짝짝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메스티조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국주의의 간섭 철폐라는 사파타의 혁명정신과 사파타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난 게다.

윤태곤님은 미디어참세상(cast.jinbo.net) 기자입니다. 윤태곤님의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블로그(blog.jinbo.net/Profintern) 로 접속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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