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월] 당신의 똥구멍은 웃고 있습니까?

일터기사

[세상사는 이야기]

당신의 똥구멍은 웃고 있습니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편집위원 박주옥

아침 방송이 끝나갈 때쯤, 쏟아지는 광고 사이에 광고처럼 짧게 지나가는 ‘포토에세이 사람’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제는 국민 DJ가 되어, 목소리만으로 CF 광고 모델료를 챙기는 배철수씨의 약간 냉소적이면서도 구수한 목소리가 좋아서 가끔 보곤 했다.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짧은 설명과 흑백사진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방송이다.

그날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35살의 한 남자였다. 내용인즉슨, 이 아저씨가 1달에 한번씩 독거노인들의 화장실을 무료로 고쳐주는 소위 ‘러브 해우소’라는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퇴행성관절염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좌변기가 없어 화장실에서 마음대로 용변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이 아저씨는 비슷한 이유로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독거 노인들을 위해 무료로 화장실을 고쳐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의사이고 퇴행성관절염에 대해 보통 사람보다 많이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지금이라도 나에게 퇴행성관절염이 어떤 병이냐고 묻는다면 ‘연령이 높아질수록, 체중부하를 많이 받는 관절에 퇴행성변화가 일어나 연골은 닳아 없어지고 뼈가 과잉 성장하게 되고 결국에는 극심한 통증과 관절의 변형, 구축이 일어나서 심각한 운동 상의 장애를 초래하게되는 질환이지요.’라고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해 줄 것이다. 그리고 더 원한다면 몇 가지 보존적 치료법을 가르쳐 주고 내키면 좋은 의사도 소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퇴행성관절염을 가진 환자에게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는지 혹은 어떤 화장실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본 적은 별로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퇴행성관절염은 일평생 우리 몸무게를 떠받친 무릎에 잘 생기고, 처음에는 통증뿐이겠지만 병이 진행되면 변형, 구축되어 결국 무릎이 접히지 않을 테니, 좌변기가 아니고서는 용변을 해결하지 못할 텐데 난 환자를 보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퇴행성관절염은 60세 이상 노인의 80%, 75세 이상 노인의 경우 거의 전 인구가 가지고 있는 질환이라고 하니, 불편하게 용변을 보고 있는 노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혹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옆집에 사는 노인이 좌변기가 없어 구부러지지 않는 무릎 때문에 바케스에 용변을 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내 짧은 경험으로 보면 농촌의 주거환경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농활을 가서 좌변기에 용변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시골의 외가집도 쪼그리고 앉는 양변기가 고작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난 심심찮게 좌변기가 없는 집들을 보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역조사를 할 때, 화장실은 그 집의 경제적 수준, 위생상태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집의 ‘질(質)’을 대표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9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3,156,353가구가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있고 이는 당시 총 조사 가구수의 24%에 달한다. 당시 조사에서 좌변기와 쭈그려 앉는 수세식 변기를 구분하지 않았으니 실제로 쭈그려 앉아야 용변을 볼 수 있는 집은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일 것이다. ‘화장실=주택의 질(質)’이라고 한다면 전 가구의 1/4이상이 질 낮은 주거환경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좌변기를 한 집에 몇 개씩 들여놓고 있는 강남의 아파트들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 화장실조차도 빈부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니!!

난 환자들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곧잘 묻는 편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 환자의 질병을 파악할 수 있거나, 이후 일상에 최소의 피해를 주는 치료 계획을 세우도록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할 수 있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직업도 없는 사람들, 즉 경제활동조차도 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인 노인들에게는 무엇을 물어보고 그들의 일상을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
그 방송에 나온 한 할머니가 새롭게 고쳐진 화장실을 보고 ‘똥구멍이 웃겄네’라며 좋아하셨다. 바로 그거다. 이렇게 물어야겠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똥구멍은 웃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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