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월] 실업과 건강

일터기사

[연구소 리포트]

실업과 건강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기획위원 김형렬

실업과 건강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

실업을 당한 노동자는 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되고, 아파도 병원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고, 영양상태가 나빠지며, 폭음이나 흡연과 같은 불건강행위의 정도가 커지는 등 전체적으로 건강상태가 나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실업을 당한 노동자의 불건강의 원인을 실업이라고 규정하고, 고용안정의 문제를 노동자의 건강문제, 노동보건의 문제로 사고한다.

그동안 실업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주로 우리나라보다 앞서 경제위기를 경험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이들의 연구결과들에서는 실업을 경험한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실업이 노동자 건강을 악화시키는 주요한 원인임을 설명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실업뿐 아니라 고용상태의 불안도 실업 못지않게 노동자들의 건강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다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자본의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수많은 노동자가 실업을 당했고(1998년 말에는 실업률이 7.9%), 이로 인해 경제적 손실, 의료이용의 저하, 자살율의 증가 등이 나타났다는 연구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건강하지 못한 노동자가 더 많이 실업을 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해석은 그동안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실업을 당한다는 주장은 실업이 불건강의 원인임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 주류의 관점에서 보자면, 건강은 타고난 체질 혹은 개인의 건강행위의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실업을 많이 당한다는 결과는 개인의 타고난 체질과 불건강행위, 즉 개인의 잘못이 실업의 원인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후자의 관점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소홀히 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업이 노동자의 건강을 악화시키며, 또한 건강하지 못한 노동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더 많이 실업을 당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상반된다기보다는 실업과 건강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후자의 관점은 여러 사회조건들로 인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건강하지 못한 노동자가 더 많이 실업을 당한다!

1995-2000년의 건강진단 자료를 이용하여 인천에 위치한 모 건강진단 기관이 진행한 연구결과를 보면, 고혈압이나 당뇨병과 같은 일반질환이나 소음성난청과 같은 직업성 질환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가 더 많이 실업을 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시점인 1996-1998년 사이에는 질병이 있는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에 비해 50% 가까이 더 많이 실업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1). 또한 이러한 현상은 규모가 큰 사업장일수록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를 정리하면 경제위기 상황일수록, 큰 규모의 사업장일수록 질병이 있는 노동자가 더 많이 실업을 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은 일반인구집단에서 매우 흔한 병으로, 그 자체가 질병이라기보다는 이로 인한 합병증이 심각한 질병이다. 그러나 치료와 관리가 매우 쉽고 간편하여 잘 조절되기만 한다면 특별히 업무에 제한을 주지 않고, 해고의 사유도 될 수 없다. 결국 질병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가 더 많이 실업을 당하는 것에는, 신체적 이유가 아닌 다른 사회적 조건이 관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림 1.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건강한 노동자에 비하여 질병을 가진 동자가 실업을 당할 가능성의 변화
(세로축의 값은 ‘질병이 실업에 미치는 교차비(odds ratio)’로서 ‘위험도’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노동자들의 건강진단결과 – 사업주는 손쉽게 접근한다.

현재 법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건강진단의 결과는 노동자 개인의 비밀로 보장되어야 할 요소이다. 하지만 이 결과를 사업주에게 통보하게 되어 있어, 사업주에 의한 노동자들의 의료정보에 대한 접근이 언제나 가능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구조조정과 감원이 일어나는 시기에 해고를 위한 근거로 노동자 개인에 대한 건강정보를 활용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현재 시행되는 건강진단제도에서 사업주에게 그 결과를 통보하게 하는 것은 건강관리에 대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기 위함인데, 특별히 관리가 필요하지 않는 경우에도 모든 자료를 사업주에게 공개하고 있다. 실제 질병을 가진 노동자들은 심한 해고의 위협을 느낀다. 특히 직업성 뇌심혈관계 질환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면서부터는 이 질병의 위험인자로 알려진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의 질병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은 치료확인서를 받거나, 금연을 하겠다고 약속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회사의 직간접적인 위협을 경험한다.

배치 전 건강진단 업무적합성 평가의 문제

질병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 질병을 잘 관리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가진다. 단지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해고 되서는 안 된다.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업무적합성 평가나 작업 배치 전 건강진단 등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공간에 배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고용여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질병이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면접에서 감점을 주거나 심지어 회사 내규를 두는 등의 교묘한 방법을 사용한다. 충분히 건강하게 일할 수 있거나 회사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함에도 질병이 있는 노동자들을 아예 채용하지 않거나, 해고하는 것이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

건강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채용의 문턱에서 한 번 좌절을 경험하며, 채용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더군다나 그 질병이 노동자들의 노동할 권리를 박탈할 정도로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절차는 없고, 임의적인 해고와 채용의 높은 문턱만이 자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질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업을 당한 노동자들은 질병에 대한 관리가 어렵게 되고, 이로 인해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이 사회 구성원이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고혈압과 같은 질병이나 소음성난청과 같이 그 직업에 종사하며 걸린 직업병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은, 노동자를 단지 생산을 위한 도구로밖에 사고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노동자는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가지며, 이 사회는 이를 보장해줄 제도적․실제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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