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월/기획1] 4.15총선과 노동자-개혁과 수구의 대립을 넘어서는 진보적 노동자 정치를 위하여

일터기사

[기획1]

4.15 총선과 노동자
개혁과 수구의 대립을 넘어서는 진보적 노동자 정치를 위하여

노동자의 힘 전 대표/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 이종회

1.
9․11 때나 이라크 전쟁 시기와 같이 정치적으로 긴박한 시기에는 서점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과 같이 드라마로도 쓰기 어려운,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시기에 누가 책을 읽으려고 하겠는가? 국회에서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 그 자체로는 민주공화국 헌법의 민주주의 절차라는 형식으로, 그러나 의회에서의 쿠데타라고 하는 탄핵은 곧바로 총선정국에 접어들었다. 외견상으로는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일으킨 폭거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온 몸을 던져 만든 총선승리용 미끼를 그들이 덥석 물은 것이라는 판단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벌이는 정치투쟁에서 국민의 생존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승리를 향한 집념만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보수와 개혁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에 우리 노동자 민중의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울산의 현대중공업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 열사가 현대자본과 현대중공업노조의 공격에 의해 아직 구천을 맴돌고 있고, 명동에서는 정부의 강제단속과 추방정책에 항의하는 농성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보호 감호소와 명동의 단식 농성자는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 비정규직 보호 방안으로 정부는 파견 대상 업종을 전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안을 내놓고 있다. 노동권, 생활권, 생존권의 기로에 서 있는 노동자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WTO와 한.칠레 FTA에 의해 소농, 가족농 중심의 농업은 급격히 몰락하고 있고, WTO 서비스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수순으로 교육, 의료, 문화는 물론 철도, 발전, 통신시장 등이 개방되고 그 사회적 공공성이 상실되고 있다. 즉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임금은 하락을 거듭하고 있으며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국회에서 있었던 탄핵의 발단은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재벌을 해체한다는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 것도 아니고, 빈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회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열린 우리당에 대한 지지가 선거법에 위반된다는 것. 탄핵을 강행한 자들이 얘기하는 선거법 위반, 경제파탄, 측근비리, 아울러 탄핵을 당한 자가 얘기하는 개혁, 그것이 노동자 민중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보수는 물론 ‘개혁’ 그 자체가 ‘진보’인 것은 아니다.

2.
87년 민중항쟁이 불길처럼 타올라 전 국민이 거리로 나서고 전두환 정권이 고심 끝에 선택한 안이 대통령 직선제였다. 혁명적 상황, 혁명을 예방하는 방안으로서의 대중적 민주주의.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집권세력은 유비무환, 미리 예방조치를 잘 취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이러한 귀결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 민중과 함께 봉건제를 타파한 이후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 지주세력은 노동자 민중의 계속되는 혁명적 봉기를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의회를 열기 시작했다. 물론 지배 계급이 기득권의 훼손을 의미하는 이러한 사태의 발전을 기꺼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란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성과이자 동시에 자본이 취할 수 있는 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 이후 신분과 남녀, 연령을 차별하는 선거 제도들은 투쟁을 통하여 하나 둘 사라져갔다.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정착이 그렇게 이루어져가면서 노동자 민중의 변혁적 예봉은 그렇게 꺾이어 갔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계급적 차별, 노동조합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법률 등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제한하는 악법들이 엄존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본가들만의 공간인 의회를 넘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기 정체성을 선언하고 대중적인 운동을 시작한 시기는, 87년 민중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에 노동자 민중후보를 내세우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독점자본의 대리자로 노태우가 출마했고, 반독재투쟁을 하던 소위 재야세력은 분화되어 시민혁명을 내세우던 세력을 대리하여 김영삼, 김대중이 출마한 가운데,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세력의 민중후보로 백기완 선생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민주주의라는 공간을 통한 투쟁으로 전화한 것이며, 정치세력으로 전화해나간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결정적으로 물적 토대를 구축한 것은 96.97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민중진영의 연대투쟁이었다. 노동자 민중투쟁의 성과는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이 노동자 민중을 대리해서 대선에 나서는 것과 민주노동당을 건설하게 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96․97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에 맞선 총파업투쟁을 접을 당시, ‘의회에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 세력이 없음을 통감하여 정치세력화에 나서겠다’는 권영길 위원장의 얘기는 이후 건설되는 민주노동당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대중정당이라는 당적 성격이 현재 민주노동당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대중정당이 그러했듯이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자마자 노동계급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논선을 한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즉 노동계급의 우선성과 대중정당으로서의 포용성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대중화노선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변혁전략에 따라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태도와 포용하는 계급계층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정당의 조직화된 대중 집회와 시위, 행진 그리고 선거 캠페인이 투쟁, 나아가 폭동이나 봉기를 대체하게 된다. 민주주의란 쉽게 길들여지면 질수록 날카로운 예각적 모순이나 불만 또한 무디고 줄어들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독일 사민당의 유명한 이론가는 ‘혁명적이면서도 혁명은 하지 않는 당’이라고 스스로를 계면쩍게 묘사한 바 있다.

3.
사상 최초로 노동자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 그것이 노동자에게 다가오는 총선의 새로운 의미가 되고 있다. 그간 한국노총 위원장은 국회의원으로 가는 경로 중 하나였으나 대부분 집권당이나 기존 정당에서 공천을 받는 형식을 띄고 있었다. 보수정치권이 노동자의 대표성을 부각하고 노동자의 표를 구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인 떡고물을 얻어먹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실상 민주노총이 건설한 민주노동당에서 국회의원이 나오게 된다면 그 의미는 다르지 않을 수 없다. 9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이 제 궤도에 오르면서 건설한 전노협과 그를 이은 민주노총, 그것이 주도한 노동자정당이 국회로 진입한다면 노동운동에는 확실히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물론 노동운동, 크게는 진보운동의 진전에 의한 성과일 것이다. 역사적 경험에서처럼 노동자 의원이 국회에서 노동자의 삶을 폭로하고 노동자의 요구를 입법할 가능성을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가질만하다. 동시에 의회정치에의 편입이라는 그 본질적 한계를 노정하겠지만, 노동해방의 진정성과 전망을 열어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초대위원장인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가 지역구에서 나오고 전노협의 상징이자 민주노총 3번째 위원장인 단병호 위원장이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등록한 이상 그동안 민주노총이 외쳐온 정치세력화의 얼개를 완성하기 위해 시쳇말로 ‘올인’하는 선거가 될 것이다.

남한의 노동운동에 대해 말하자면, 최근의 세계운동진영에서 지난 96․97년 총파업투쟁을 지구적 수준에서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큰 이정표로 볼만큼 그 의미가 지대하다. 그리고 우리의 전투적 노동운동은 늘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서구의 경로를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산업화단계에서 대기업 체제 하에 잘 훈련된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남한의 노동운동을 이끌어왔다고 한다면 이제 자본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서, 정치운동의 진전에 따라 이전의 양상과는 사뭇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전망이 그것이다.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동운동, 정치운동이 그런 경로를 밟아갔듯이 말이다.
남한은 지구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전략이 늦게 도입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속도는 여느 나라보다 빨라서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고, 지금은 세계화라는 새로운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축적체계의 재편은 이미 우리 사회 계급구성과 성격을 변화시켰고, 시키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성이 그러하고, 자영농 중심 농민의 존재가 몰락해나가고 있는 현실이 그 분명한 예증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폭격당한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빈곤이 사회의 본질적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노동자 민중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전반 또한 이에 철저하게 재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운동의 전망곡선을 아래로 또는 위로,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 바로 그 기로에 4.15총선이 있는 것이다.

4.
2002년 대선은 우리 사회변화의 한 지표였다. 그간 반공, 친미, 반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국가보안법을 통치기제로 활용해 온 보수 세력이 무너졌다. 그들이 통치를 위해 공고히 해왔던 억압적 사회관계에 저항하는 대중적 요구에 부합하면서도,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축적전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연화된 사회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자유주의적 정치를 대변하는 소위 개혁세력이 승리했다. 북한을 시장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요구에다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체계를 재생산하는 남한사회의 정치‧사회관계를 재편하고자 하는 김대중의 방북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국가보안법은 무력화되고 보수정치구조는 뿌리째 흔들려버린 것이었다.
총선을 앞둔 탄핵정국은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전략에서는 동일하나 근간을 달리하는 보수와 개혁세력간의 일대접전이다. 개혁세력은 억압적 사회관계에 저항한 87년 민중항쟁을 온전히 그들의 유산으로 전취하면서, 대선 당시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매개로 한 가두 대중동원으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집회에서 보자면 이한열 열사도 ‘임을 위한 행진곡’도 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고, 그 개혁의 흐름에 노동자 민중이 함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소부르주아 시민운동은 당연하겠지만 민중운동진영도 연대여부를 두고 교란되고 있으며, 벌써 일부는 그들과 함께 깃발을 흔들고 있다.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개혁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진보가 아니다. 지배 세력은 국민 대중에게 정서적인 충성심을 획득하기 위해 대중 운동과 경쟁해왔다. 김영삼 정권이 부마항쟁을, 김대중 정부가 광주항쟁을 그리고 망월동 5․18묘역을 전취해갔듯이.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혁명가였던 라 마르세에즈를 지배 권력이 선점해버리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가라는 사회주의운동의 상징물을 새로 고안해내듯, 이제 진보의 상징물을 새로 올려야 할 때이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민중운동이 각기 제 역할을 제대로 할 때이다. 노동자 민중을 대변하는 배타적 정치구조에서의 대중 정당, 민주노동당의 역할은 특히 선거시기에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울산에서 박일수 열사의 노동해방, 비정규직 철폐라는 만장을 앞서 들고 투쟁하고, 명동에서 단식투쟁하는 이주 노동자와 함께 세계화 반대 투쟁의 깃발을 들고 투쟁하는 선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파병을 투쟁이 아니라 국민투표로 국민에게 물어보자던 그 때를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리고 동요하던 탄핵 국면에서의 민주노동당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 분신한 노동자를 탄압하는 노동자들의 밀집 지구에서의 표를 얻기 위한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오히려 핵폐기물을 반대하여 스스로 자치구․해방구를 선언한 부안 주민들이, 선거에서 후보를 내고 투쟁을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듯 스스로 자치를 계속해 나갈 선택을 할 것인지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5.
노동운동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것 이상으로 심려되는 것은 향후 자본의 지배질서에 포섭된 노동자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역전이다. 민주노동당에서 몇 명이 당선될 것인가가 관심거리인 이번 선거를 지나면, “노동운동에 조응하는 노동자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치운동에 조응하는 노동운동”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자본의 노동 관리 체제가 이제 사회적 합의주의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편입된 노동자당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유럽의 경험에서 잘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이 오랜 역사의 사민당과 잘 조직된 산별 노동조합의 상징처럼 불리고 있는 독일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것을 투쟁으로, 봉기로만 내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국회에서 공화국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탄핵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민주주의가 진전된 국가에서 의회 전술이 의미 없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기본권을 위한, 노동해방의 진전을 위한 디딤돌로서의 현실적 대안과 전망을 주체적 입지에서 모색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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