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월] ‘가정적’이란 말에 화가 나는 날

일터기사

[세상사는 이야기]

‘가정적’이란 말에 화가 나는 날
– 고 김진균 동지를 생각하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교육위원 오주환

일이 끝나면 다른데 들르지 않고 즉각 집으로 퇴근하여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사람을 ‘가정적인 사람’ 이라고 한다. 아내와 자식을 아끼는 남자인 사람을 주변에선 참 가정적인 가장이라고 칭송한다.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근무 중에도 틈틈이 가족들과 통화를 하면 주변에선 약간의 질투와 함께 또 한편으론 칭찬한다. ‘참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가정적’, ‘가정적’이라… 생일날엔 좋은 선물을,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여가를 보내고, 평일의 저녁 때는 가끔씩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한다… 참 ‘가정적인’ 남편이고 아내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진료 중이었고, 받지 못했다. 선배로부터 온 전화였다. 전화를 다시 하려던 생각을 잠시 잊었다. 며칠이 흘렀다. 그 며칠간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생각이 났다. 전화를 했다. 이번엔 선배가 진료 중이어서 통화를 못했다. 그러다가 처음 전화가 온 지 한 주가 거의 지나서야 통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하기 참 어렵네… 그때 모처럼 전화하셨는데 무슨 일이라도?” 대답은, “응. 김진균 선생님 빈소에 같이 가자고 하려고…” 깜짝 놀랐다. “아… 그분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이제야…” 난 사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한 지 꽤 오래된 터인데다 그 당시는 신문과 방송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빴던 덕에 선생의 가시는 길마저 보지 못했다.

마음씨 좋게 보이셨던 그분은 전노협의 지도위원이셨고, 그 후 민주노총의 지도위원이셨다. 선생의 이름 석자 앞에 이젠 ‘고(故)’를 붙여 써야 한다. 그분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셨고 얼마 전 정년을 하셨다. 그 외에도 진보진영의 활동적인 단체들의 대표셨다. 그분은 나를 잘 모르셨다. 난 그분을 알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동자대회 같은 집회가 있을 땐 항상 단상에 계셨고, 노동자와 민중을 위한 자리엔 항상 계셨던 분으로 기억이 생생하다. 중요한 일이 있는 자리엔 언제나 계셨다. 윤건차라는 일본의 인문학자가 쓴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이란 책엔 한국의 진보적 지성을 이끄는 인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언젠가 송년회자리에서 그분께서 전노협 출범식 때 자리에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천진스런 표정으로 백발의 모습을 하고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가슴 벅차하시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이 떠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며칠동안 멍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지냈다. 한번도 고 김진균 선생과 긴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도 없는 내가 왜 허전하고 우울하였을까?

집에서 가게를 하면 가족들은 무보수로 달라붙어 같이 일해야 한다.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나라에서 목돈이 들어갈 큰 일이 생겼을 때 이를 도와야 할 것도 ‘가족’과 ‘친척’이다. 취직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하는 책임도 가족이 져야 한다. 큰 병에라도 걸렸다 치면 가족과 친척들이 모아주는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

고 김진균 선생께서 살아 계셨을 때 썼던 수많은 글 중, 요즘 가장 나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은 ‘가족’에 관한 글이었다. <현장에서 미래를>이란 월간지에서 본 그 글의 전체 내용은 지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글에는 가족이 얼마나 억압적이며, 착취의 근간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찬찬히 씌여 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그 ‘가족’을 해부하고 해체하시던 글의 그 신선한 충격이 지금 다시 아련히 떠오른다. 그 글의 후미쯤엔 가정에 충실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가족들에게만 그것이 미칠 때의 그 무서움에 대해 말하신 글의 느낌이 생생하다. 구체적으론 가족이 아닌 자를 위해 ‘돈’을 내라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아니라 ‘가족이 아닌 자’를 위해 살아가고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난 내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있는가? 김진균 선생은 가시면서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나보다. 그렇게 우울한 시간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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