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월/만나고싶었습니다]항상 처음처럼, 노예의 삶을 거부한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 조광한

일터기사

항상 처음처럼, 노예의 삶을 거부한다
–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 조광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기획위원 김소진

(intro)
질긴 투쟁으로, 조선소 하청노동자로서는 최초 근골격계 산재승인을 받은 조광한동지. 한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늦은 오후, 물어물어 찾아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풋풋한 음성을 가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하청노조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출근투쟁을 하며 삭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제법 흰머리가 비치는 조광한동지는 올해 42세. 조그만 중소기업체에 다니고 있는 아내와 중학생, 초등학생인 두 아이의 아버지라 했다. 중공업에서 하청으로 일한지 14~15년 된다는 그는 처음에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다. 공개조합원 선언을 하고 지난 5월 산재판정을 받기까지 그의 경험들과 활동들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아예 조선소 밥을 못 먹게 되기 때문에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돼요”
박일수열사가 비참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의 삶을 세상에 폭로하고 분신한 이후, 조용기동지와 조광한동지는 하청노조 공개 활동을 선언하고 현장 안에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노조활동을 전개해 왔다. 처음 공개조합원 선언을 할 때 그는 사흘 밤을 잠도 제대로 못자고 좌절과 갈등을 많이 했다고 했다.
“현대중공업 만큼은 이렇게 대놓고 하는 게 힘들죠. 일을 포기해야 되요. 아예 현대 밥을 못 먹는 거 뿐더러 조선소 밥을 못 먹게 되기 때문에,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서 진짜 많은 고민을 했죠. 저는 이제 몸도 망가지고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여기서 나가면 끝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계속 탄압이 온다, 그러면 어떻게 버틸 것인가?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죠. 공개조합원 선언을 하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공개조합원 선언을 하기 전 현장에 있을 때, “내가 하면 같이 따라오겠냐?” 했을 때, “그럼요. 형님.”하던 친구들도 막상 하니까 안 따라오더라구요.”
그는 이것이 지금 현실인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서 바꾸고자 하는 마음은 다 가지고 있는데, 불이익이나 해고를 당할까봐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것을 볼 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4년 동안 위장취업 하는 사람 봤어요?”
산재승인 과정까지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몸이 아픈 것 이외에도 회사와 공단과의 갈등 등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많이 받게 된다. 울산에는 공장들도 많고, 그만큼 산재환자들도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한동지는 산재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계속 부딪히며 도전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산재판정 서류를 집어넣을 때 회사에서 낸 서류를 봤는데, ‘파워그라인딩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조광한이는 노동운동가이고, 위장취업이다’라고 냈더군요. 14년 동안 위장취업 하는 사람 봤어요? 게다가 총무가 서류 위조를 해서 진정서를 올리고, 산재신청과 상관없는 집회 사진 찍어서 올리고. 사장이 예전에 같이 알고 지내던 작업자였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나 싶더라구요. 정말 아는 사람이 더 무섭구나, 참 세상 험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이렇게 받았으니까 당신들도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거죠.”
조광한 동지는 하청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자신의 산재판정을 계기로 정말 아픈 사람들이 산재승인을 받고 다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14년을 다녀봤지만, 사람들을 보면 참 불쌍해요. 보너스가 있나 뭐가 있나 회사 관두라는 것도 자기들 마음대로예요. 집에 가서 좀 쉬어라 하면 그게 바로 해고에요. 타지방에 있던 사람이 여기 와서 ‘현대계열사’하면 제일의 조선소이고 정말 큰 회사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 실제 일하면 중소기업체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게 돼요.”
그는 현재 근골격계 산재인정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어려움과 경험들을 살려 하청 노동자들의 산재상담을 해오고 있었다.
“산재승인을 받기까지 약 4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너무 고통이 심하고 힘들어서 다른데서 일할까 하는 고민도 했었어요. 제가 이번에 산재승인 받은 것도, 조선소나 하청노동자들 중에서는 최초예요. 나도 이렇게 받았으니까 당신들도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거죠.”
하청노동자들은 여기 와서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며 고마워한다고 했다. 그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니 많은 하청노동자들이 산재상담을 와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정규직 안 만들게끔 해주는 게 당연한 권리고 도리라고 봐요.”
조광한동지에게 지금처럼 활동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물으니, 단번에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잘 챙겨주지도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긴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오히려 자신이 배우는 것이 더 많다면서, 아이들이 크면 이러한 활동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저도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한테 주면 좋겠어요. 모든 부모가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못 주고, 좋은 옷 입히고 싶어도 못 입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빠가 비정규직 안 만들게끔 해 주는 게 당연한 권리고 도리라고 봐요. 내가 봤을 때 우리 자식들도 다 비정규직 되거든요. 요즘엔 박사학위 받은 이들도 비정규직 많잖아요. 그렇게 안 되게 해주는 것이 아빠의 책임이고, 그렇게 만들어 주면 그 애들은 조금만 싸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조광한동지는 자신은 참 운이 좋은 것 같다면서 인생의 가치를 마흔 넘어 느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이냐며 선한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은 저를 운동가라고 하지만 전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이런 것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거든요. 빨리 치료받고 현장에 다시 들어가서 조합원 활동을 하고 싶어요. 인생이라는 게 다 잘 된다는 보장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내가 최대한 노력하고 그것을 우리 아들이나 딸들이 이어간다고 하면 내 인생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그가 “울산이 왜 울산인지 아세요?”하고 묻는다.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가는 곳이 울산이에요.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짜 다른데서 지치고 지쳐서 울면서 돈벌러 여기에 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중에는 골병들고 울면서 떠나는 곳이 울산이에요. 전에는 노동조합도 없었고 울면서 왔다가 떠나는 사람이 더 많았죠.” 얘길 듣고 다시 한 번 ‘울산’이라는 지명을 되뇌어 보니 왠지 마음 한 편이 시리다.
조광한동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기 전에 항상 처음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당해고와 해마다 계속된 일방적인 임금삭감에 맞서,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나선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은 또 하나의 노동자 선언이다. 투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들과의 어깨 걸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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