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월] 단결과 투쟁, 예외는 없다

일터기사

단결과 투쟁, 예외는 없다
– 노동안전보건운동 주체들의 연대를 위하여

이훈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기억하고 복원해야 할 노동안전보건 운동
현장노동자들이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꽤 오래 전의 일이었을까? 아니다.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있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듬해였다. 1988년 5월 15일 ‘노동과 건강연구회’ 창립과 함께 발행한 <노동과 건강>이라는 잡지가 세상의 빛을 보았다. 당시 제출한 노동과 건강에 대한 관점과 실천제안은 이전에 비해 가히 ‘혁명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는 점에서 접근했던 기존의 관점을 극복하고, 노동하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안전보건 문제에 대한 관점과 해결을 현실 노동(조합)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자리매김하게 하기 시작하였었다.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현장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전노협 시기에 산안일꾼들은 현장활동을 선도하였던 문화일꾼들과 함께 노동안전보건 문제 해결을 위해, 일상 활동의 선봉에서 실천하였다. 현장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추고 대중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한 ‘노동자 장(葬)’ 장례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에 맞서 현장과 세상을 바꿀 주체들이 노동안전보건 문제를 중심으로 현장주체들을 일상적으로 묶어세웠던 모범이었다.

노동과 건강 문제에 대해 선도적 역할을 하다가, 2001년 ‘산재추방운동연합’ 해산과 함께 중단되었던 <노동과 건강>이 올해 봄호(통권 67호)로 복간하였다. 최근에 주요 지역차원에서 ‘노동강도 강화 저지’를 위해 산안일꾼 실천학교 기획과 실행, 그리고 소식지 발간과 공동실천을 의식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참으로 소중해하고 보듬고 가꿔나가야 할 시도들이다. 어찌 <노동과 건강>의 발간 주체와 지역주체만의 문제이었겠는가.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안전보건운동 주체 전체의 꼬라지 때문에 비롯된 것이리라. 노동안전보건 운동 주체들이 겪었던 가슴 아픈 단절과 혼돈을 곱씹어야 한다. 개인과 사안에 그치는 기억이 아니라, 전체노동자의 실천경험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그간 실천과정에 대한 반성을 올곧게 해야 할 터다. 자본과 정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똑바로 보고, 대중행동을 조직하여 돌파할 방안을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노동안전보건운동 진영의 단절과 혼돈에도 불구하고, 현장과 지역 그리고 단체 주체들은 선도적인 실천으로 현장을 바꾸고 주체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현장행동을 면면히 지속시켜 왔다. 작업중지권 쟁취와 실행, 작업환경권 쟁취 쟁점화, 이상관동지 등 수많은 노동자의 산재사망 인정투쟁, 근골격계 직업병투쟁, 유해요인조사 관련 지역공동투쟁, 지하 승무노동자의 정신질환 직업병 쟁취투쟁, 심야노동 철폐투쟁 쟁점화, 직무스트레스 관련 직업병 투쟁 등등. 모든 주체들이 부여잡고 복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현장행동으로 시작하여야 하지 않을까.

‘속내’ 들여다보기와 드러내기
‘신자유주의 분쇄’. 적어도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는 익숙해진 구호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과제도 마찬가지다. ‘노동강도 강화 저지’ 역시 그렇다. 그러나 실상은 노동자들의 실질적 이해와는 별개로 반복되는 당위적 주장인 경우가 허다하다. 노동자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과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것으로, 어렵고 복잡한 그 무엇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본은 노동자 쥐어짜는 것에서 IMF 위기의 해결점을 찾았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는, 노동자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은 ‘고용에 대한 협박’을 빌미로 현장노동자들을 통제해왔다. “마른수건도 짜면 물이 나온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현장에서 자본의 힘을 몸으로 느끼는 개별노동자들은 자본의 논리와 통제에 스스로 왜곡되었다. 그래야 임금노동자로서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는 골병과 죽음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아프다고 말하고, 치료받고, 일할 권리’조차 요구와 저항의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는 현장은 아주 적다. 그렇다. 현장은 어느 정도 자본의 손아귀에 장악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현장에서 희망의 용트림들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골병과 죽음의 벼랑 끝에 선 현장주체들이 노동자 현장통제를 위해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을 집단적·대중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노동하는 이들 전체의 실천적 과제로 어떻게 확대해 가느냐가 관건이다.

현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안전보건운동 주체들의 ‘속내’도 그리 녹녹치 않다. 소위 ‘건강권’을 둘러싼 관점과 실천에 있어서 혼돈과 갈등이 있다. 노동안전보건운동 영역에서 건강문제에 대해 독자성을 강조하고 방점을 찍는 주체들이 있고, 건강문제 역시 구조적·현실적 근원에 대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체들도 있다. 택일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근본원인의 해결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하면서, 건강권 등 기본적 권리 쟁취 과제를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현장에 밀착해서, 작아 보이더라도 중요하게 자리매김하면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현장의 주체를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드는데 집중해야 할 터다. 누군가에 의존하거나 대신해서 해결할 일이 아니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하기와 한 발 내딛기
현실의 치열함이나 절박함 그 자체에 안주하면, 이기고도 진 싸움을 하게 된다. 자본은 최근 5월 17일 기업안전보건위 정기총회에서 노동강도 강화 저지투쟁에 대한 대응방안을 구체적으로 재확인하였다. ‘단위사업장 울타리에 가두고, 치료문제에 국한시켜, 노동유연화 분쇄를 노동운동의 과제로 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네 목소리와 행동은, 건강에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노동유연화 분쇄를 위한 영역운동으로서 역할을 구체화해야 할 때다. 주체들마다 역사와 경험, 그리고 지향의 측면이 다양하고 다를 수 있다. 노동안전보건 단체와 활동가들 모두가 소위 ‘국화빵’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대동단결’이라는 묘약이 힘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인 듯 보이나, 묘약은 없다. 현장의 주체들과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결합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노동안전보건 운동 주체들이 견지해야 할 원칙과 실행방안을 제시하고, 일상적인 노동자 현장통제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각개약진하면서 말이다.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는 ‘우리’가 현장주체들에게 이야기하고 실현하려 하듯이, 스스로에 대해서도 적용해야 한다. 최근 노동자들의 골병과 죽음에 대해 ‘개 닭 보듯’ 하는 현장 분위기는, 당시 현장을 멈추고 대중적으로 치러진 ‘노동자 장’을 복원함으로써 극복해 나가야 한다. ‘단결과 투쟁’으로부터 예외인 주체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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