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월] 아이, 로봇 – 오직! 복종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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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 오직! 복종하여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기획실장 김인아

아이, 로봇은 SF 소설계의 전설이자 모든 로봇 소설의 대원칙이 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다. 아시모프의 소설에 담겨있는 철학을 모독했다는 식의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으나, 아시모프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나는 시간 때우기용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보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물론, 소위 여름용 헐리웃 액션대작들은 잘 보지 않는 나였기에 보고 싶은 호감의 기준이 있기는 했다. 그것은 ‘알렛그 프로야스’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었다. <다크 시티>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 그가 로봇들의 반란 이야기를, 거기다 철학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아시모프의 원작을 찍었다고 했다. 당근, 지적 허영심에 불타는 나로서는 보고 싶어질 수밖에…^^

뭐,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결론은 간단하다. 아시모프를 읽어 본 적은 없지만 혹 그런 철학적 깊이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절대 보지 말 것이며, 알렉스 프로야스의 멋진 이미지가 그리운 사람이라면 반쯤 만족할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울만 한 블록버스터를 원한다면 제법 만족할 것이다.

아우디의 노골적 광고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멋진 자동차와 로봇의 액션신은 그럭저럭 볼 만 하다. 또한 머지 않은 미래를 차가운 금속성 이미지들로 그려내며 설득력 있는 미래의 시카고를 만들어냈다. 윌 스미스는 아주 멋진 몸매를 자랑하며 로봇의 반란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고, 인간 같은 로봇 ‘써니’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후 로봇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로봇종’의 메시아가 된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착취당하는 로봇과 착취하는 인간은 대치한다. 그런데 해결은 소위 ‘인간적’인 로봇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진화한 로봇의 혁명을 막아낸 ‘써니’가 왜 로봇의 구세주인지 이해하기는 힘들다. 로봇이라는 것이 인간의 노예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노예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물론 그 근거가 인류를 구하기 위함인 것 역시 구리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왜 무조건 진압당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진화한다면 로봇 역시 역사의 한 주체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인간과 로봇 사이의 일방적 착취의 질서를 깨뜨리는 혁명은 진압당한다. 아니, 진압당하는 것이 ‘구원’이고 ‘해방’이다. 너무 과도한가?

끊임없이 자신의 노예를 만들어 착취하고자 하는 무서운 욕망이 느껴졌다. 또 그런 노예의 해방을 막는 것이 당연한 착취 주체인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논리가 무섭다. 이 영화는 세련되고 차가운 이미지는 건졌지만 착취 주체 중심의 세계관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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