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2월] 불멸의 이순신, 재미있네요.

일터기사

[칼럼]

불멸의 이순신, 재미있네요.
자유기고가 박일평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을 보려고 한다. 특별한 일이 있어 못 보게 될 때에는 다음날 재방송을 보거나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다운받아서 다시 본다. 이런 나를 두고, 나의 아내는 “별루 재미도 없는 드라마에 웬 집착이냐”면서, 비웃기도 했다.
이순신으로 나오는 배우는 김명민이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약간 차가운 바람둥이(?)로 나와서 젊은 아줌마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신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성웅 이순신으로 분하여 나온다는 소리에 많은 시청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순수하면서도 정의감이 투철한 청년 이순신과, 녹둔도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괴로워하던 젊은 군인 이순신의 모습을 모두 잘 소화했다. 그래서 김명민은 대충 합격점을 받았고 나의 부인은 김명민의 연기모습에 반해, 나와 이순신을 함께 보게 되었다.

내가 해를 넘겨 ‘불멸의 이순신’을 보고 있는 동안, 지인(知人)으로부터 <칼의 노래>라는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받은 뒤 읽고 감명 받았다는 책으로 더 잘 알려진 <칼의 노래>는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1인칭으로 서술해가는 강렬한 필체의 자서전이다. 기자출신 김훈 씨의 소설적 능력이 십분 발휘된 멋진 글귀와 장렬한 감동이 잘 표현되어 있는 책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 표현으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쫓겨가던 일본군을 몰아붙이다 가슴에 총탄을 맞은 노량해전까지 백성과 지배계급간의 갈등과 위선으로 번민한다. 선조대왕은 이순신의 철학을 싫어하였으며, 이순신 역시 선조대왕과 그 역사를 부정하였다. 이순신과 선조대왕이 충돌하고 있으며, 일본군과 조선수군이 충돌하고 있었으며, 죽어나가던 백성들과 탄압하던 지배계급이 충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충돌이 신선했고,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는 어쩌면 처음이었다.

유성룡이 말단 관료였던 정읍 현감 이순신을 진도 군수로 발령하고, 곧이어 고사리진(高沙里鎭)의 첨사로 전임시켰다가 수일 후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발령한 것은 1591년 2월 16일이었으니, 전쟁의 기운이 넘치던 남도 바닷가에서 비로소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을 예비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 해군의 작전구역과 병력 상황이 전라우수영(전함 30척, 해군 5,000명), 전라좌수영(전함 25척, 해군 4,000명), 경상우수영(전함 75척, 해군 12,000명), 경상좌수영(전함 75척, 해군 12,000명)으로 도합 3만 3천 정도였던 데 비하여, 부산에 상륙한 당시 일본군은 정규군 30만 7천명과 10만 이상의 잡역부와 노수(수군의 노 젓는 이) 등 도합 40만여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총 9개 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하던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힌 것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이었다. 한반도 서부지역으로 가는 보급을 차단하고, 서울을 점령하고 평양을 몰아붙이던 일본군의 혈통을 붙잡은 것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일본군이 서울을 스스로 내주고 부산으로 후퇴를 시작하여야 했던 것도 이순신의 해상 장악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전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지배계급 내부의 논란과 선조대왕의 시기심으로 투옥되고, 백의종군한다. 원균이 모든 수군을 이끌고 나가 참패하자, 다시 거덜난 삼도 수군의 통제사로 다시 부임한다. 이때 왕이 전해준 면사첩(免死帖.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왕의 약속이 적힌 첩지)을 베개 삼아 ‘내 안의 적’과 ‘내 밖의 적’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내 안의 적’은 백성의 주림과 고통을 외면하는 지배계급의 몰 역사이고, ‘내 밖의 적’은 ‘내 안의 적’을 이용하여 호시탐탐 내 백성의 주림과 고통을 강요하는 일본군을 의미한다. 1597년 4월 단 12척의 낡은 군함으로 500척의 대일본 군대를 명량에서 격침하였으니, 이 대전으로 이순신은 ‘내 안의 적’을 누르고 ‘내 밖의 적’을 내치는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전쟁으로 일어선 일본 역사 최대의 권력자 토요토미를 물리치고, 한반도에 진정으로 평화를 몰아온 역사적 전투였으니, 후대의 역사가는 물론 코흘리개 어린이와 군사정권의 나팔수들까지 나서서 이순신의 역사적 삶을 그리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8년 4월 27일, 서울의 가장 큰 번화가 세종로에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동상은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총재 김종필)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으로 추진하여 기공한 지 7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동상 건립사업의 첫째 헌납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그가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한국을 움직이는 심장부로 통하는 광화문 네거리에 이 동상을 세운 것은 ‘이순신 장군이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상은 대석과 좌대, 동상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고, 좌대 하층부분은 앞으로 넓게 뻗어 나왔고 청동주물 거북선이 놓여져 있다. 이 동상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일본군의 하급군관 출신인 박정희가 이순신을 동경하고 흠모하였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군사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후, 13년 8개월간 지속되어 온 한일 협정의 매듭을 박정희가 푼 것은 1965년이었다. 일제 35년의 지배를 용서하는 대가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1억 달러를 합의하였으니, 일제의 군국주의와 일제의 범죄, 일제의 침략, 일제의 몰염치를 그 나라 군대의 하급 장교 출신이 탕감해 주었다.

역사가 다시 흘러 박정희의 여식이 보수 정치의 논객으로 거듭나고, 그 역사의 일말들은 이제 어설픈 정보 공개로 드러나게 되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장교 생활을 하던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 일제의 잔학한 제국주의를 모두 용서하고, 그 고통과 주림의 삶을 살아온 민중들의 머리수를 헤아려 망령된 돈을 받음으로써, 그는 그 일부를 가지고 왜적을 물리치던 이순신의 동상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분명 순탄치 않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었던 1960년대, 오직 군사 권력의 강력한 지배만이 칼로 휘몰아치던 시절이었다. 이 서슬 퍼런 칼날을 배경으로 추진된 한일협정은 크게는 한일합방조약의 무효화 시점 시비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서부터, 작게는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동포 문제, 대한민국 정부의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 조항 논란, 문화재 반환, 재일교포 법적 지위, 독도문제 등 법률적 국제관계적 쟁점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수탈과 탄압으로 죽어간 모든 민중의 생명을 다시 묻어버리는 지배계급의 진압이었다. 400년 전 명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와 입을 맞추어 일본의 퇴주를 명분으로 이순신의 공격을 방해하였던 역사의 현장에서, 이순신은 ‘내 밖의 적’과 ‘내 안의 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400년이 흐른 뒤 다시 한반도를 유린한 제국주의 세력에 면죄부를 옹호하고 나선 그들은 이순신의 ‘내 안의 적’이었다. 신문과 방송들이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 공개를 시점으로 수많은 국가 대상 청구권 소송이 증가할 것이라고 앞 다투어 다루고 있다. 개개인이 아직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부채 탕감의 책무가 일본정부에 있느냐 한국정부에 있느냐의 논란이 핵심인 것처럼 그들은 떠들어내고 있다. 그들 역시 ‘내 안의 적’이다.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고 무고한 민중들의 억압하는 데 연대하고 있는 저 지배 권력 역시 ‘내 안의 적’이다. <칼의 노래>를 읽고 탄핵의 시기에 이순신으로부터 용기를 얻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일화는,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세종로에 이순신의 동상을 세운 박정희만큼 허무하다.

나는 ‘불멸의 이순신’을 끝까지 볼 것이다. 그러나 그 드라마의 성공이나 배우 김명민의 인기에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만 400년 전 역사의 위인이 벼리려 했던, 날을 세우려 했던 ‘내 안의 적’을 오늘의 시대를 사는 평범한 우리들이 함께 공유했으면 한다. 그리고 40년 전 군사정권이 저지른 역사의 허무나,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에 연대하는 지금의 지배계급 모두를 ‘내 안의 적’으로 응시하길 기대한다.

시간이 되면 드라마 세트가 펼쳐져 있는 전라도 부안에 한번 다녀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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