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2월] 일상을 낯설게 보자

일터기사

[문화마당]

일상을 낯설게 보자
민주노총 문화국장 박선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전반부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까지 들먹여가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일상’이라는 것도 이 시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일상은 늘 우리와 같이 한다. 항상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 있다. 공기나 물처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느끼지 못한다. 일상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일상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냥 일상은 일상일 뿐이라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일상은 그렇게 허술하게, 허접쓰레기 대하듯 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아니 그렇게 박대하다가는 큰코다친다. 코가 깨지기 전에 우리는 일상이라는 이 애매하고 야리꾸리한 존재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일상을 자본이 겹겹이, 첩첩이, 물샐 틈 없이, 아주 두텁고 완벽하게 둘러싸 버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자본은 우리가 아침에 깨어서 밤에 잠들 때까지, 아니 잠들어 있을 때도 우리를 지배한다. 잠시라도 우리를 감시하고, 억압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유혹하고, 강요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질기고도 질긴 스토커가 되어 우리의 일상을 자본이 감시하고 다닌다는 이 무서운 사실을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자본의 문화에 젖을대로 젖어서 전혀 불편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깨끗하다는, 도덕성이 생명이라는 운동판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들이 일어나는 이유도 다 거기에서 비롯된다. 양성평등을 얘기하고 차별철폐를 목이 터져라 외쳐도, 이런저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공을 들이고 노력을 해봐도 잘 고쳐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들의 일상을 자본이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자본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두 번의 싸움으로는 어림도 없다. 여러 가지 싸움을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끊임없이 벌여야 한다. 자기가 일하는 현장(사무실이든, 공장이든, 백화점이든, 병원이든)을 자본으로부터 되찾아 오는 투쟁이 그 첫째일 것이요, 술을 먹는 중에도,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회의를 할 때도, 여가를 즐길 때도, 여행을 할 때도, 길을 걷고 밥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우리는 자본 문화와의 투쟁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꾸준하게, 끈질기게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게 바로 일상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자본이 포위해버린 일상, 자본의 일상,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닌 일상, 그 일상을 뒤집어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뒤집어 보고, 의심해 보고, 관찰도 해 보고, 반대로 다시 보고, 거꾸로 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고, 누워서 보고, 물구나무서서 보고…
자본문화와의 일상적인 투쟁은 이렇게 일상을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일단 일상을 낯설게 보고, 의심해 보고, 하나의 허점이라도 찾아내야만 우리는 그 일상과의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과의 투쟁에서 이길 수가 있다. 아무리 쪽수가 많고, 힘이 세도, 단단한 댐이 조그만 구멍 하나 때문에 무너지듯이,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문화가 자본에게 먹혀 있다면 무슨 개혁이, 무슨 변혁이 가능하겠는가? 설령 변혁이 성공했다하더라도 곧 바로 뒤집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상을 낯설게 보고 끊임없이 일상과 투쟁하는 것, 이것이 깨어있는 자들의, 노동자들의 가장 큰 임무요 역할이 돼야 한다. 일상은 낯설게 볼 때만이 진정 일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꽃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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