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월] ‘녹슬은 해방구’를 읽고

일터기사

[세상사는 이야기]

‘녹슬은 해방구’를 읽고
군산 노동자의 집 여은정

어떻게 내가 ‘녹슬은 해방구’를 읽게 되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사무실 책꽂이에 몇 년 동안 있었지만 본체만체 하던 책, 학교 다닐 때 동아리 방 한구석에 놓여있어도 그저 들었다 놨을 뿐 그 땐 읽고 싶은 맘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어느 날 보니 내가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초반부를 읽으면서는 ‘참 노골적인 선전/선동가네. 이건 소설이 아니라 아예 선전물이네. 이렇게 문학성이 떨어져서야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몰라. 쯧쯧…’ 이러면서 읽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 책에 푹 빠져들어 눈물 콧물 흘리고 있는 낯선 여자가 있었으니… 문학성이 문제가 아니라 제주에서, 화순에서, 거창에서, 지리산에서 죽어간 민중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학교 다닐 때 교양 정도로만 알았던 제주 4⋅3이 여수⋅순천 항쟁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죽어간 우리들을 기억하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민족주의적인 면과 반여성적인 시각이 워낙 강해서 읽으면서도 약간의 반감이 생기긴 했지만 내 고향 진안 백암의 빨치산의 존재가 실재였다는 점이 무지 놀라웠다. 어릴 적 어른들이 뭔가를 꺼리면서 쉬쉬하던, 봄소풍을 가던 덕태산 동굴의 해골얘기며 산길에서 종종 주웠다던 총알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나 선명하게 나와 있던 ‘동창(1950년대 당시 진안군 백운면 소재지)’이라는 지명까지도 그러니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아버지의 ‘나 어릴적에 말이다. 빨갱이들이 내려와서는…’하면서 시작되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은 진짜 처절하게 싸우다 죽어간 빨치산들의 존재를 알리는 새로운 인식이었다.

빨치산 루트를 찾고 그 투쟁의 흔적들을 찾는 것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맨 처음 내가 한 것은 설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그 당시의 얘기를 듣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굴비처럼 엮인 채 동네 앞을 잡혀갔던 빨치산들이 동창 인근에서 집단 암매장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 흥분한 내가 그게 어디쯤이냐고 묻자, 갑자기 어른들이 그런다. 그건 그냥 지난 일이고 그런 것 까진 알지 못한다고. 그저 살려고 산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이라는 인식과 역사의 피해자라는 말씀은 하시면서도 뭔가 얘기를 안 하는 분위기다.

빨치산은 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그것도 양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는 것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이니 지나친 나의 관심을 접으라고 충고하신다. 얘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아 소설 쓰려고 그러니 말 해달라고 했더니, 막 웃으시며 그냥 “흰구름 흘러가는 곳~” 그런 소설을 써야지 이런 것은 안 팔린다고 말씀하시고는 다들 입을 다무신다.

50년이 지났지만 뭔가를 경계하며 말씀하시는 어른들…
“빨갱이라던 미재의 누구는 결국 고향을 떠나 서울 어데서 잘 산다고 하데.”
“기억하지, 자고 있던 방에 신발 신고 와서는 아랫목의 배급 쌀을 털어간 군화를”

작은 아버지 말씀하신다. “역사는 승리하는 자의 몫이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들은 기억될 것이다.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국방부? 국정원?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나는 천천히 사람들을 만나서 찾아보기로 했다. 10년이 걸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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