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월] 안락사와 자살, 토끼 그리고 노동자

일터기사

[칼럼]

안락사와 자살, 토끼 그리고 노동자
자유기고가 박일평

생존과 사망의 경계가 비좁아지고 있는 현대 의학에서 죽음과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이 있다. 흔히 알려진 안락사가 그것이다. 다른 용어로 안사술(安死術)이라고 하는데 고대 그리스어의 ‘Euthanatos’에서 유래한 말로, ‘좋다’는 의미의 ‘eu’와 ‘죽음을 뜻하는 ‘thanatos’가 결합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영어로는 ‘mercy killing (자비로운 살인)’으로 풀이하지만, 결국 ‘살인’이란 의미가 강하다. 독일어의 ‘Sterbehilfe’는 ‘죽음에 대한 도움’이란 뜻으로 좀 더 구체적이다. 안락사가 결국 자연적으로 죽을 수 있는 시간을 줄여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생명의 종결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법적, 의학적 논쟁의 이슈가 되어 왔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의학적 논쟁이 법적 논쟁의 형태로 치닫고 있다. 1994년 6월 네덜란드에서는 한 정신과 의사가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던 한 여인에게 치사량의 수면제를 주어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대법원이 의사에게 유죄임을 인정하되 형은 선고하지 않은 예가 있다. 이는 ‘죽을 권리’에 관한 법률을 한계상황에 이른 정신병 환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판례로 남게 되어 안락사를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에까지 확대한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네덜란드에서는 2001년 4월 안락사를 합법화하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노던준주(州) 다윈에서는 1996년 조건부로 허용 법안을 마련하였다. 미국 오리건주는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며, 벨기에·콜롬비아·스위스에서는 사실상 묵인하고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안락사는 중대한 도전이 된다. 1995년 로마 교황은 안락사를, “모든 고통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그 자체로써 그리고 고의적으로 죽음을 가져오는 행위나 부작위”로 정의하고, 이를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규정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논쟁은 적지 않은데, 2001년 4월 대한의사협회에서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를 수용하는 윤리선언과 윤리강령을 발표하여 논쟁을 유발하였다. 이 윤리지침은 특히 ‘회복불가능 환자’에 대해 가족들이 자율적 결정에 따라 문서로 치료중지를 요청할 경우 의사는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안락사가 인간의 죽을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지만, 그 중심에는 타인의 적극적 혹은 소극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살과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살 (suicide)은 인간이 스스로 그 자신의 생명을 종결하는 행위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다. 그 원인이 카드 빚이든, 실연으로 인한 상처이든 누구나 감내하기 힘든 절망에 사로잡힐 경우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과적 측면에서 보자면 평화롭고,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 상태를 넘어, 그 이상의 스트레스에 빠져들 때, 나타난다고 한다. 사실은 의학적으로 자살은 정신과적 질환의 한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생명을 종결하는 행위 그 자체는 ‘정상적인 정신상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2004년 9월에 출판된 만화집 ‘자살토끼(거름 펴냄)’는 털북숭이 토끼의 기상천외한 자살시도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책에서 토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자살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자살’이라는 말에 섬뜩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만화집은 꽤 재미있는 유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표지를 살펴보면, ‘ON’으로 되어있는 토스터 안에 토끼가 들어가서 죽음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 나와 있는데, 그 외에도 책의 구석구석에는 놀랄 만큼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토끼의 자살 방법’이 담겨 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할복하려는 일본군 병사의 등 뒤에 찰싹 붙어 함께 칼에 찔리고, 지하 핵 실험장을 파고드는가 하면, 다른 동물들이 황급히 노아의 방주에 오르고 있을 때 자리를 펴고 일광욕을 즐기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죽음의 문제를 희화화하고 맹렬하게 비웃는 이 토끼의 모습은 우리 시대의 심각하고 우울한 주제들을 잠시 잊게 한다. 어느 보수 일간지의 서평에서처럼 “독자들은 자살 시도 이후의 결과를 상상하며 몸서리치기보다는 자살 방법의 기상천외함에 박장대소하게 된다. 그리고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활력도 얻을 수 있다. 자살을 하려고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토끼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낙천주의와 소박한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이 책은, 그래서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현미경일 수 있다.

2002년 통계청에 따르면, 사고 및 중독으로 인한 사망은 전체 사망의 약 12%를 차지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손상으로 인한 사망 중에서 주요 원인은 운수사고(31.9%), 자살(29.9%), 추락(10.9%)의 순이었는데, 자살에 의한 사망이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난 10년 전에 비하여 자살에 의한 사망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며, 사고에 의한 사망은 감소하고 있다. 1998년 경제 위기에서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하였던 자살에 의한 사망이, 그 후 약간 주춤하는 듯하였으나, 다시 그 증가추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자살의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즐겨 쓰는 방법 중에는 ‘독극물 음독(Poisoning)’,‘추락(Fall)’,‘의사(Hanging,목매기)’,‘분신(Burn)’등이 있다. 잘 알다시피 일본은 과거 할복을 자살의 주요한 수단으로 여겨왔으며, 서구는 총기물에 의한 자살이 많다. 인도의 경우 자살의 가장 흔한 수단은 분신이다. 불교 국가인 인도에서는 분신이 꽤 신성한 수단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는 여인들의 가장 선호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자살의 수단이 이처럼 사회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은 대개 대동소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발현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 자살은 대부분 의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2004년 5월 변호사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생계형 자살은 하루 3명꼴이며 자살 건수도 2000년 786건, 2001년 844건, 2002년 968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고 1990년대 초에는 ‘분신정국’이라고 부를 만큼, 분신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저항이 지속되기도 했기 때문에 저항으로서의 자살이 익숙한 편이다. 최근 천성산 도로 개발을 반대하며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인 지율스님의 행위 역시 자살을 향한 장구한 행위라는 점에서 본질상 다른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0일간의 단식은 그 자체로 생명을 중단시킬 수 있는 ‘독극물 중독이나 분신’과 같은 수단이 된다. 다만 그 시간이 장시간에 걸려서 서서히 진행된다는 점만 다르다.

2005년 1월 22일, 새해 벽두부터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우리나라 최대 기업 중의 하나인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노동자가 분신을 시도하였다. 이 날 분신자살을 기도한 이유에 대해 그는 “내 한 몸 희생해서 비정규직 철폐가 된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동료 노동자에게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그동안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할 것 같아서 망설이다 오늘을 디데이로 잡았다”고 말해, 이 날 분신자살을 미리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일 오전 11시 20분경 현대자동차노조 사무실에 들러 평소 친분이 있던 조합원들과 평소처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사무실 복도에 있는 화장실로 가 시너로 추정되는 액체를 끼얹고 분신을 시도했다고 하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던 것 같다. 그는 지난 2003년 2월 현대자동차의 하청업체인 대연(주)에 입사했으며 지난해 8월 작업에 따른 무릎염증으로 산재 판정을 받고 오는 3월까지 산재 기간 중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노동자가 극심한 화상과 사투(死鬪)를 벌이는 지금, 이 노동자의 절규는 잊혀진 지 오래이다. 한 달이 다 지나가는 마당에도, 현대자동차에는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고단함이 남아 있으며, 전 세계로 수출되는 자동차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눈물이 여전히 배여 있다.

사람에게 고귀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은 바로 인권을 둘러싼 논쟁이다. 삶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처럼, 죽음 역시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항을 위한 자살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아닌, 사회가 강요한 타살이다. 자살은 ‘고귀한 죽음’을 위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배제된 한 인간이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행위’인 것이다. 독재 권력에 대항한 투쟁의 수단이든, 천성산 개발에 대항한 항거이든, 사업주의 탄압에 대한 항의나 산재 불인정에 따른 절망에 대한 저항이든, 우리 사회의 자살은 “사회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과 죽임의 시간들이 너무 쉽게 잊혀져버리고 있다. 아니, 잊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살토끼와 같은 엽기적 토끼의 죽음을 위한 노력에 찬사와 웃음을 보내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지닌 이중성과 부패, 그리고 그로부터 죽임으로 내몰리는 삶의 군상들이 자살토끼로 둔갑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새해 시작부터 을씨년스러운 현장의 한기(寒氣)로 벌써 몸서리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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