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월] ‘옳은 것’이 우선시되는 문화

일터기사

[세상사는 이야기]

‘옳은 것’이 우선시되는 문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오주환

2년 전 프랑스에 1주일 정도 가 있었던 때가 요즘 갑자기 다시 떠오른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숙소에서 시내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나라 시내버스처럼 중간중간마다 버스정류장에 섰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프랑스의 시내버스도 달렸다. 조금 다른 것은 버스 2개가 연결되어 있는 매우 긴 버스가 많았다는 점뿐. 이 버스는 최근 서울에서도 가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고 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길에서 서버렸다. 이유인 즉, 버스가 곡선구간을 돌려하는데 길가에 정차해놓은 승용차에 닿을까봐 운행을 할 수 없어서였다. 잠시 후 승용차 운전자와 버스기사간에 언쟁이 벌어지더니 급기야는 몸싸움으로 발전하려 했다. 난 프랑스어를 몰라서 뭐라고 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가끔 보는 거니까.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몇 분이 흘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가장 급한 약속이 있거나 가장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승객 중 한 명이 “그만 갑시다!”라고 말하고, 다른 한두 명의 승객이 맞장구치면 거의 분위기는 정리된다. 싸운 버스기사는 불필요한 일을 한 것이 되고, 버스기사는 승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운전을 하다가 벌어진 잘못된 일에 항의하다가 거꾸로 그 승객들에게 시간을 지체하는 주범으로 둔갑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선 승객들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도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 불쾌해 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오히려 싸움을 전부 다 진진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승용차 운전자가 버스입구에 타서 싸우다가 다시 내려가고 버스가 출발하려 하자 진풍경이 벌어졌다. 버스 승객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나와서는 자신의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는 싸인을 하는 것이었다. 뒤의 사람은 연서명을 그 종이 위에 계속하였고, 버스기사에게 무언가 건네는 말의 분위기로 봐서는, 아마도 조금 아까 벌어진 일에 대한 목격자 진술쯤에 해당하는 내용을 스스로 나와서 써주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연서명을 한 것 같았다. 버스는 이제 운행 중이었고 잠시 후 버스기사가 경찰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였고, 경찰차가 출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에 대해 프랑스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보통 정당한 항의가 주는 소란함에 대해 소란한 것만 더욱 부각되고 항의의 정당성은 온데간데 없게 되는 경우를 자주 겪어서, 대개는 정당한 항의를 해야 할 상황이 있을 때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때의 목격은 정말 프랑스에서는 당장의 편리함보다 “옳은 것”이 더 우선시 되는, 그런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드는 기회였다. 이런 점은 홍세화씨의 프랑스 망명기인 ‘세느강은 좌우를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도 여러 군데 느낄 수 있다. 가장 크게는 프랑스에선 과거 나찌시절의 협력자들에 대해 공소시효도 없이 지금도 과거의 행적이 드러나면 가차 없이 응징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선 친일파들의 일제시대때 재산이 다시그들의 후손에게 돌려지고 있는 상황인 점과는 정말 딴판이다. 우리나라에서 선호하는 대학학과인 의대,법대가 프랑스에서는 인기도 순위의 뒤쪽에 있다는 점도 그렇고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혁명이란 커다란 역사를 정면승부한 경험때문인지 옳고 그른것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개인에서 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보다는 훨씬 더 명확한 것 같다. 물론 자신들의 알제리 식민지에서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 정도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는 홍세화씨의 언급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분명 그런 것이었다.

남아시아 해일이 휩쓸었을때, 프랑스정부는 자국의 보건장관을 그곳에 각종 약품들과 함께 상황이 발생하자마자 파견했고, 뒤이어 100년동안 한번도 한적이 없다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야간개장을 해일피해 성금모금을 위해 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분위기가 타국과는 다소 다른 건강성이 있다. 난 항상 그것이 과거를 엄중하게 단절한 프랑스 혁명의 소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3월초 총파업을 벌였다. 주당 35시간이라는 세계최단근로시간을 가진 나라의 국민들이 노동시간 연장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주장에 제동을 걸기 위해 취했다는 이번의 총파업은 전국을 마비되었다고 한다. 진압을 위해 출동해야 할 경찰도 경찰노조의 파업으로 출동하지 않았다나. 전체 교통의 70~80%가 멈취설 정도의 위력적인 파업이었다고 하며, 프랑스에서 개최신청한 올림픽에 대한 IOC방문단의 방문일에 맞추어진 파업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런날 파업을 하면 매국노취급으로 언론에서 도배질이 되지 않던가? 그런데 프랑스에선 이런 기사도 없었단다. 아무튼 정부는 “패배”를 시인하고 협상을 제의하였다고 한다. 프랑스는 내가 알기로는 한국의 노조가입율보다도 더욱 낮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집단적인 행동으로 자신들의 정의를 당당하게 외치고 또 승리하는 것 같다. 한명한명 힘없는 사람일 수 있지만 옳은 것을 위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보이는 문화속에서는 옳은 것을 위해 단결을 엄청난 규모로 해내는 것 같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확산을 위해 정부는 법을 개악하려 하였고, 민주노총은 그를 막는 총파업이 불가하다 주장하는 중앙집행부가 정부와의 협상테이블에 가야겠다고 하였었다. 대중적으로 문제제기 당하자 지금은 직권으로 협상테이블에 가겠다고 갔다. 프랑스에서는 위력적인 총파업에 굴복한 정부가 협상하자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총파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상하여야 한다고 노동자들의 대표라는 조직의 집행부가 말하였다. 이 방식이 한국의 노동자나 국민들에게 더 좋을까 프랑스에서 최근에 한 방식이 더 좋을까? 노조조직률도 낮은 프랑스에서도 하는 일을 우리는 왜 못한다고 할까? 전 세계에서 노동운동이 매우 강하기로 손꼽힌다는 나라에서 왜 손에 꼽힌다는 이야기도 없는 프랑스에서 하는 총 파업같은 것은 시도도 않고 다 포기하는 것일까? 프랑스 노동자와 국민들의 자신들의 요구과정에서의 그 당당함이 멋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신문과 방송에서도 이런 기사를 하루 빨리 볼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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