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월] 연맹 위원장은 성골이고, 지역 본부장은 진골이다.

일터기사

[칼럼]

연맹 위원장은 성골이고, 지역 본부장은 진골이다.
자유기고가 박일평

현대의료는 필수의료와 사치성의료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사치성의료는 생명이나 건강을 추구하기보다는 미용과 과시를 철학으로 한다는 면에서 전통적인 의학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과 현대인의 요구 증대는 사치성의료의 위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진흙(mud)이 매우 환영받는 피부미용 의약품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최근 알려지기 시작한 ‘귀족 수술’ 역시 별로 낯설지만은 않다. 동양적인 인상을 부정하고, 서구적 외모를 추구하는 일부(?)의 기호가 사실은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끄는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귀족수술을 통해 서구적 미를 추구하는 게 아주 빌어먹을 짓이 아닐 수도 있다.
귀족수술은 코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지까지 높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귀족수술’이라고 부른다. 대개 동양인은 입이 나와 있으며 얼굴의 느낌이 밋밋한 인상인 경우가 많다. 낮은 코는 입을 더 튀어나와 보이게 하기 때문에, 코를 높여주면서 귀족수술을 함께 시행하면 이미지가 많이 부드러워지고 입체감 있는 얼굴로 보이게 된다. 귀족수술이 필요한 경우를 정리하자면 첫째, 입이 튀어나와서 지적인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경우 둘째, 입가에 팔(八)자주름이 잡혀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우 셋째, 보다 얼굴을 작게 보이게 하고 싶은 경우 등이라고 한다. 귀족수술 방법은 입안의 점막을 절개해서 그 안에 삽입물을 넣어주는 방법으로 시술한다. 시술되는 부위는 입가의 팔자주름이 생기는 부위로서, 입이 나온 경우 그 부분이 함몰되어 나이가 들어 보이고 신경이 쓰이게 된다. 이 점을 귀족수술이 해결해 준다고 보면 된다.

공작(公爵, Duke/Duchess), 후작(侯爵, marquis/ Marchioness), 백작(伯爵, Earl/Countess), 자작(子爵, Viscount/Viscountess), 남작(男爵, lord) 등은 중세 서구 귀족을 일컫는 것들이다. 이들 5개 작위는 장자에게 세습되어지기 때문에 ‘세습 귀족’ 또는 ‘유작 귀족(Peerage)’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런 전통적인 세습작위는 아니지만 본인이 평생 귀족의 반열을 유지할 수 있는 근대적인 의미의 작위들도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전 영국수상이 1992년 남작작위를 받았고 그의 남편인 데니스 대처는 귀족에 포함되지 않는 세습 작위인 준남작작위를 받았다. 사실 지금도 런던의 땅은 웨스터민스터 공, 베드퍼등 공, 그로스배너 공, 사우스햄튼 공 등 손으로 헤아릴 정도의 명망 있는 집안의 소유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런던의 동네 이름 중 “Earl’s Curt” “Baron’s Curt” 등 귀족이 살던 저택의 이름을 딴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작위가 살아남아 있지만 혁명의 역사를 수립한 나라들은 이 귀족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1848년 혁명 이후, 러시아는 1917∼18년 혁명 이후 귀족제도를 폐지했으며 독일은 3월 혁명 이후 실질적으로 이 제도가 없어졌으니, 가히 중세를 넘어서는 과정은 귀족제도를 폐지하는 것과 함께 하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이들처럼 그 연원과 유래가 비슷한 ‘골품제도’라는 게 있었다. 골품제도는 신라시대에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진출, 혼인·의복·가옥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규제를 한 강력한 신분제도이다. 골품은 세습성이 강하고 신분간의 배타성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 골품(관등제)의 특징은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던 반면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골품제가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지만 이 중 으뜸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기의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신라 정치의 운영원리인 골품제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진골 귀족간의 왕위계승 다툼이 치열해지는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는 골품제가 변화된 사회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채 폐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골품제의 한계에 회의를 지닌 계층의 불만이 누적되고, 계속된 자연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 위기에 처하였다. 이로써 신라사회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골품제는 신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양반과 평민, 노비의 구분은 있되 특정 귀족계급이 나눠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중세 유럽에 비해 귀 사회의 기반이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약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일반 노동자보다 고액·고율의 임금과 높은 지위를 얻고, 생활양식이나 의식구조가 부유층과 같아진 특권적인 노동자층을 노동귀족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의회 및 기타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 등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거나 보수를 받고, 지배계급에 협력하는 관료화한 노동조합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 등의 간부는 노동관료라고 세분화하여 부르기도 한다. 노동귀족의 전형은 산업자본시대 영국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부 숙련공층이나 감독직에 있는 자가 자본가에게 매수되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일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우익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국가나 공공단체의 의원 혹은 임직원 등이 되어 자본가와 협력하는 경향이 많았고 이를 통상적으로 지칭하는 게 노동귀족이라는 용어이다. 전통적인 귀족에 비하여 그 권한이 작지 않고 종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노동계급의 분열과 부패, 한계를 공격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용어는 없을 게다. 불평등을 파괴하자는 불평등한 집단의 호소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대조일 것이다. 노동귀족은 본질상 자본이며, 혁명으로 처분되어야 할 역사적 유물의 하나일 것이다.

국내 대부분의 일간지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논하면서 노동귀족의 출현과 지배, 이들에 의한 부패와 비리를 염려(?)하고 나섰다. 이들이 한결같이 염려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위기이다.

“국내 노동운동이 검찰 발(發) 격랑에 휘말려 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올해 초 기아차 광주공장 노조의 취업 장사와 전국항운노조의 비리는 서막이었다.”(A신문)
“민주노총도 현대자동차 노조 비리라는 암초를 만나 또다시 흔들거리고 있다. 기아차 노조 채용비리 때 사과문을 발표하는 등 자정(自淨)을 장담했던 민주노총은 현대차 사태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더욱이 현대차는 조합원 42,000명이 있는 민주노총의 주력 사업장이어서 사태 추이에 따라 충격파는 더 클 수밖에 없다.”(B신문)
“현장에서 노조의 파워가 커지면서 권력화, 이권 집단화됐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동귀족’이란 말이 일반명사처럼 통용된 지 오래다. 최고급 승용차인 에쿠스 타는 노조간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C신문)

귀족수술이 유행인 것처럼 자신의 밋밋하고 투박한 노동자성을 벗어내고자 하는 유혹이 거칠다. 세습과 종신으로 유지할 수 있는 특권을 추구하여 노동조합 위원장은 공작, 부위원장은 후작, 그리고 소의원은 남작이 되고 싶어 한다. 연맹 위원장은 성골이고, 지역본부장은 진골이다. 이미 천 년 전에 사라진 특권 계급, 절대 권력과 부를 세습할 수 있었던 역사적 유물인 골품제도가 유령처럼 21세기 한국의 노동계급을 흔들어내고 있다. 이미 혁명의 유산으로 박물관에 전시된 서구 귀족의 작위가 노동운동의 본령을 장악하고 있다. 자본과 언론의 홍보만으로 이런 믿음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에 가입조차 어려운 한 무리의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나, 불안과 공포로 살아가는 외국인노동자의 눈에는 ‘꼴값하는’ 요지경 세상의 일면일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자본과 노동이 하나로 통하는 경이로운 역설로 보일 뿐이다.

귀족을 철폐하는 내부 혁명의 필요성이 거듭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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