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1월/이러쿵저러쿵] 익숙함에 대하여…

일터기사


익숙함에 대하여…

서울도시철도 노동자 정 흥 준

나의 현재 공식적인 활동직함은 ‘해고된 노동자’다. 그래서 소속도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며 나는 매일 본사 앞에 있는 천막으로 출근한다. 아침 출근투쟁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여 8시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항상 10분씩 늦게 도착한다. 고쳐보려고 해도 이제는 잘 안 된다. 버릇의 무서움이다. 그곳에는 나를 포함해 14명의 해고자들이 3일에 한 번씩 3개조로 나뉘어 당직을 선다. 입사해서 해고되기 전까지 3조2교대 습관에 익숙해서인지 쉽게 적응했다. 역시 습관은 무섭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났다.
3월 초에 농성에 들어가서 전기장판 깔고 자다가 어느새 인지 모르게 전기장판이 없어지고 시원한 대나무장판을 깔더니 이제 다시 전기장판을 깔고 잔다. 본사 앞에서 8시부터 1시간가량 피켓팅을 하다보면 매일 똑같은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에 지나간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한 3개월이 지나니까 얼굴을 완전히 익혔다. 그래서 우리들끼리 장난삼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별명을 지어 ‘오늘 ***이 늦네?’, ‘***이 오늘도 째려보고 가네.’ 등 농을 주고받기도 한다. 한번은 천막 앞에 서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과 동료가 서로 알고 지낸 것처럼 목 인사를 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침 출근투쟁 때 지나가던 사람이어서 그 사람도, 내 동료도 쑥쓰러웠다며 말한 적이 있었다. 익숙함이 빚어낸 일이 것이다. 익숙함은 이러한 일상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민주노총은 ‘총파업투쟁’을, 우리는 ‘총근무투쟁’을

민주노총이 노사관계로드맵을 중심으로 한 한미FTA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총파업투쟁을 벌이기 위해 한창 준비 중이다. 그런데 우리 노동조합은 분명 민주노총, 공공연맹 소속인데도 아무런 준비도 없다. 아예 논의도 없고 활동가라는 우리도 당연한 듯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 한번은 평소 민주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지부장이 농담 삼아 ‘우리는 총근무투쟁 합니다.’라는 자조 섞인 한탄을 했는데, 자꾸만 기억 속에서 맴돈다. 익숙함은 버릇이 되고 버릇은 습관이 된다고 했는데, ‘내가 너무 무뎌진 것은 아닐까.’ 고민해 본다. 공기업에 가해지는 구조조정에 대해 묵인으로 동의하고 있는 자칭 ‘온건노조/실리노조’이며 내가 보기엔 ‘전형적인 노사협조주의자’들이 벌이고 있는 행태에 내가 너무 빨리 익숙해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익숙함이 때로는 맘 편하고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익숙함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구태에 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부턴가 현재 노사협조주의 성향의 노동조합 집행부를 보며 ‘이 놈들은 이렇게 할 테니까 너무 맘 아파 하지말자’라고 스스로 위안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행부에서 공공연맹 맹비를 납부하지 않는 일도 ‘그런 놈들이니까’라고 넘겼고, 구조조정에 대해 몇몇 활동가들이 그래도 뭔가 해보겠다고 이것저것 할 때 오히려 우리를 공격하는 집행부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는 놈들이다.’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는 덜 받기는 하지만. 왠지 마음 한 편에선 ‘이건 아니잖아’라는 유행어가 떠오를 때가 많다.


불합리한 현실에 어색해질 수 있도록

나는 얼마 전 대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면 정기 대의원대회가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안건이 참으로 기가 차다. 일반적인 정기 대의원대회 안건인 예·결산 말고도 두 가지 안건이 올라왔는데 하나는 해고자희생자보상기금 축소를 통한 조합비 인하와 또 다른 하나는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조합가입 여부에 대한 결정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할 의사를 밝혔고 노동조합 규약 상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노동조합은 이를 선뜻 수용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노동조합에 비정규직이 가입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래서 집행부는 노동조합 규약을 새로이 해석해보자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현실은 오로지 ‘저놈’들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10년을 민주노조 운동을 위해 노력해 온 ‘나와 우리’도 ‘저놈’들이 보다 강하고 세련되게 하는데 어느 정도는 원인제공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말이다.

다시 일상에서 익숙해져버린 현실에 대해 생각해본다. 반노동자적인 노무현에, 비인간적인 자본에, 노사협조적인 어용에, 무수한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다시 이러한 익숙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다시 어색해질 수 있도록 머리와 몸을 굴려봐야겠다. 익숙함이 버릇이 되고 버릇이 습관으로 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듯 아마도 짧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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