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월/특집1] 운동 20년, 역사 속에서 길을 묻다

일터기사

운동 20년,
역사 속에서 길을 묻다

노동건강연대 회원 전 수 경

1. 들어가며

노동자건강권운동 20주년을 정리해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선 좀 망설였다. 운동사를 매끄럽게 정리할 만큼의 능력도 안 되는 데다가, 사적인 이유로 휴직중이기에 자격도 미달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어설프게라도 지난 운동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꿈틀거린 것이 사실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노래처럼, 20년 전 이 운동의 깃발을 올린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분명한 것은 운동이 전개되어 온 시간 속에서 우리는 20년 전 그들을 계속 만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이다.

본인의 능력과 노력이 모자라 아주 미약하게, 앙상하게 20년의 시간을 정리하는 시늉만 내고 말았다. 특히 20년의 운동 중에서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의 운동은 서술할 능력이 안 되어 간략하게 언급하며, 전문적 운동조직, 전업활동가들의 운동 부분만 서술하는 것에 양해를 구한다.
지금, 우리 운동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신 다른 필자들의 글을 통해 함께 배우는 시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

2. 산재추방 운동조직의 등장과 운동의 전개

1) 운동의 태동과 노동과건강연구회 창립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비롯하여 그 이전의 힘겨웠던 어느 노동운동에서라도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개선, 작업환경 개선이 중요한 요구였다는 것은 새삼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태일이 절규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요구도 되짚어 보면 노동자들이 처한 비정상적인 작업조건과 그 안에서 육체와 생명을 저당잡힌 채 노동해야 했던 어린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 아니던가.
1987년의 민주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찾아온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열린 국면이 빚어낸, 소년노동자 문송면의 수은중독에 대한 대정부투쟁과 원진레이온노동자들의 빛나는 투쟁은 87년 이전 공장의 울타리 안에서 병들고 죽어가야 했던 선배노동자들의 분노와 고통이 밑거름이 된 것이었음을 헤아려 본다.

87년 운동의 성과로 각 부문에서 전문가, 지식인들의 사회변화에 대한 욕구, 사회참여적 활동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보건의료 영역은 전문가들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부문 중 하나일 것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등이 이 때 결성되었고, 의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성찰과 실천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한편 지역에서 노동자, 빈민에 대한 진료활동을 펴는 병의원도 속속 문을 열었으며, 구로의원, 사당의원처럼 87년 이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곳도 있었다. 특히 구로공단 초입에 자리잡은 구로의원과 상담실은 <노동과건강연구회> 창립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보건의료운동가들은 노동운동, 민중운동과의 연대의식이 높았고, 전체민중운동, 민주화운동 속에 자리매김하는 부문운동으로서 보건의료운동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노동운동 안에서 운동의 주체가 성장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던 산재, 직업병, 건강권 문제를 보건의료운동가들이 자신의 과제로 인식한 것은 당연했다 할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88년 3월 <노동과건강연구회(노건연)>가 설립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노동조합운동의 한가운데에서 노건연은 할 일이 많았다. 설립 초기 문송면, 원진레이온과 같은 이슈를 사회적으로 확장하고, 대정부투쟁으로 발전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건연과 같은 지원단체가 문을 열자 묻혀있던 직업병사건, 산재사고들이 고구마줄기 캐듯 터져 나왔다.

2) 지역운동단체의 등장과 활발한 연대활동

90년 하반기가 되자 많은 지역에서 활동단체가 결성되었다. 지역의 보건의료운동가들은 지역의 공단지역에 필요한 산재상담, 교육, 캠페인 등을 펴기 위해 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광주노동건강상담소, 성남노동건강상담소, 부산노동자건강을위한일꾼회, 부산참노동건강상담실, 대구산업보건연구회, 마산노동자건강을위한일꾼회 등이 문을 열었다.
이 단체들은 전국의 센터역할을 하고 있는 노건연을 벤치마킹하되, 지역의 조건과 요구에 맞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88년부터 매년 발행된 [산업안전보건활동을위한공동교육훈련집]을 보면 교육훈련의 주최자가 구로의원, 노건연에서 92년부터는 지역 단체 전부가 주최와 주관으로 참여하는 형식으로 확대된 것을 볼 수 있다. “91년 4월 「전국지역활동체간담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산재추방운동 단체들이 모여 사안별 공동사업 모색과 일상적인 정보, 자료교환을 해왔다. 그리고 92년 초에 있었던 「5차공동교육훈련」을 계기로 「지역활동체대표자전국회의」로 바뀌면서 체계화, 정례화되어 전국적인 연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 92년 발간된 6차 공동교육훈련자료집에서 밝히고 있다. 대표자회의는 이후 「전국산재추방단체연대회의」로 개편되어 정부 정책에 대한 공동대응, 지역적 현안에 대한 전국적 공유, 활동가 재교육 등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3) 산재추방운동연합의 건설과 실패

97년 IMF 사태가 노동현장을 강타하였다. 고용과 삶의 위기 앞에 노동자들은 쉽게 흔들렸고, 자본은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을 손쉽게 덮어버린 채 자신에게 유리한 구조조정의 방식을 관철할 수 있었다. 노동시장유연화를 부르짖으며 노동자를 내쫓는 구조조정 속에서 산재요양을 신청하는 ‘간 큰’ 노동자들은 악몽에 시달렸다. 고비용저효율의 본보기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대기업노동조합은 노동환경을 악화시키는 자본의 공세에 별 대응을 하지 못했으며, 노동진영은 안전보건의 제도적 장치를 완화시키는 정부에 대해서 힘겨운 싸움을 벌어야 했다.
자본과 정부의 압도적 우위 앞에 운동의 위기를 절감한 단체활동가들과 주요 대기업노조는 단일한 전선을 만들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단일한 조직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1년여에 걸친 지난한 토론을 거쳐 99년 1월 「산재추방운동연합(산추련)」이 출범하였다. 서울의 노건연은 조직을 해산하고 산추련의 사무국단체가 되었으며, 마창지역에는 산추련의 지역조직인 「마창거제산추련」이 결성되었다. 지역의 단체들은 산추련의 회원단체로, 대기업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99년 하반기 창원에서 산재노동자 이상관이 요양도중 자살하면서, 자살을 산재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장기농성이 시작되었다. 산추련의 이름으로 행한 첫 번째 공동사업이자 대정부투쟁이었던 이 노숙농성은 6개월동안 계속되었다. 산재인정은 실패하였으나 산재요양과정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 원직장복귀 문제 등 요양과 재활의 사각지대에 대한 고발과 함께 산재보험 개혁의 당위성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었다.
그러나 산추련 내부적으로는 투쟁의 목표와 교섭전술 등에서 이견이 생기고, 갈등이 커졌으며, 급기야는 봉합할 수 없는 불화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결국 산추련은 2001년, 결성 2년 만에 해산절차를 밟게 되었다.
운동의 성패는 조직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인식과 창조적 운동방향, 상호신뢰와 공감의 크기에 좌우된다는 값진 교훈을 남기고, 산추련은 역사의 한페이지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4) 모색과 생존의 기로에서

산추련해산 이후 운동의 지형은 새롭게 재편되었다. 산추련의 사무처로 흡수되었던 (구)노동과건강연구회 활동가와 전문가들은 「노동건강연대」를 결성하였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도 문을 열었다. 원진레이온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녹색병원」이 문을 열었고, 병원 산하 「노동환경건강연구소」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마창산추련, 대구의 산업보건연구회, 인천의 건강한노동세상(구 산업사회보건연구회) 같은 지역 운동단체들도 쉽지 않은 조건이지만 여전히 건재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IMF 사태 이후 더욱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내부의 삶의 격차와 이에 따른 건강권의 격차, 노동운동 내에서 여전히 우선순위의 의제가 되기 어려운 현실, 더욱 강고해지는 자본과 정부의 공격 속에, 이들 단체들은 새로운 운동과제를 발굴, 확산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운동의 이슈를 발굴,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운동 내부의 관성이랄까, 변하지 않는 문제점 몇 가지가 운동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때가 된 것 아닌가 한다.

3. 운동의 성격

산재추방운동은 초기단계부터 산재발생의 정치경제적 원인을 확인하며 이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산업재해는 우리사회에서 노동자가 처해 있는 상태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이익과 재난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산업재해가 발생하게 되는 주요원인 또한 작업조건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나 노동자의 전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여타의 사회적 조건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적인 규정요소들과의 관련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산업재해가 발생하게 되는 필연성과 현실에서 산업재해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운동이 전개되면서 구체적 활동을 짚어보면 기업별 노조의 한계, 노조 조직의 정치지형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노동자의 전 생활에 미치는 여타의 사회적 조건들’과 산재문제를 연관시키는 활동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산업안전보건과 관련한 기술적, 미시적 문제들이 운동의 주요과제로 부상한 측면이 있고, 이는 노조운동의 요구와 단체활동가들의 ‘보건의료인적’ 관심사가 결합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결성 초기 운동의 주체와 조직의 역할에 대한 논의자료를 보면, 이들은 보건의료인(전문가, 지식인)이 주체가 되는 독자적 운동영역을 가질 것인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야 할’ 이 운동에서 노동자가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운동의 보조자, 조력자가 될 것인가 토론하였다. 결론은 후자가 대세였다.
노건연을 비롯하여, 지역활동단체의 활동가들은 노조조직의 회의참석에서부터, 실무지원, 조합원교육사업, 전임자 파견 등 사실상 노동조합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면 최대한 지원하는 것을 활동의 우선순위로 삼았다.

한편 88년, 89년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건설될 시기의 자료를 보면 공해추방운동(환경생태운동), 반핵평화운동, 과학기술민주화운동과 같은 부문의 운동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공해추방운동가들은 이 운동의 초동단계 논의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공해와 산재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추구과정이 빚어낸 문제이기에 활동방식은 다르더라도 운동의 성격은 같다고 인식하였다.
“앞으로 공해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적으로는 구로지역의 작업 속에서 여러 가지 작업과 대책활동 속에서 참여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저희는 작업장 환경문제에 대한 것과 노동자의 공해피해에 대해 그것을 선전해내고 가능하면 전문적인 지식으로 지원하면서 공동작업을 해 나간다면 그것이 작업장 환경문제로 다루어지든 아니면 노동자의 산재문제로 다루어지든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후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환경운동과의 구체적 공동사업이나 연대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산재운동은 노조조직내 운동을 건설하고 안착시키는데 많은 비중을 두었지만, 운동의 내용은 기업별노조의 한계 안에 갇혀있는 면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환경운동이 공장의 공해문제, 공단의 환경오염 문제로 활동을 펼 때 노동조합이 기업이 울타리에 갇혀 환경운동과 적대적(?), 비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례가 자주 나타났고 이는 환경운동이 노조운동, 산재운동과 거리감을 갖게 한 원인중 하나가 아닌가 짐작해본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겠다.

운동의 초기에 만들어진 활동의 영역은 현재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가장 필요한 영역이었던 산재상담을 시작으로, 노조간부교육, 노동현장의 실태에 대한 조사연구와 사회적 이슈화, 정책 및 제도개선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90년대 초반부터 노건연이 상담사례를 축적하고,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적 심각성을 이슈화한 과로사문제는 이후 노건연 안에 과로사상담센터를 별도로 열 만큼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산재보험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와 개혁운동 역시 상담활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법제도개선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요양과정, 재활정책의 문제를 힘있게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 사례발굴, 산재노동자운동과의 연대 안에서 가능했던 활동이라 하겠다.

4. 노조조직 안에서의 운동

정권과 자본의 탄압 속에 노동조합을 지켜내야 했던 전노협은 건강권문제를 주요과제로 상정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활동가 양성 또한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과제였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노조를 중심으로 현장의 노동환경과 건강문제에 대한 조사연구, 교육활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92년 당시 전노협은 전국산업안전보건부 간담회를 구성하여 2개월에 한번씩 지역을 순회하였다.

산재추방운동의 중요한 일과제가 노동자의 주체적 세력화 문제라고 할 때, 지역에서 건강권과 산재직업병 문제를 풀어가기 위gi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 형성은 아주 귀중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노동운동의 험로 속에서 오히려 산추운 관련 노동자 조직이 와해되어 가는 곳도 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반면, 92년 지활체의 성과 속에서 초보적이나마 지역 노동자의 연대모임이 꾸려져가고 있는 곳도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문제는 노운의 어려움과 정체의 복잡성 속에서도 어렵게 추스러진 각 모임들을 알차게 꾸려나가면서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들일 것이다.

96년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산업안전국이 만들어지면서 노동조합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총연맹 산하의 업종별 연맹들 또한 노동안전보건활동을 주요과제로 삼고 조합원들의 상태에 대한 조사연구, 교육, 활동가양성에 투자를 시작했다.
노동조합 운동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노동안전보건의 기술적, 미시적 이슈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지 않았나 싶다. 물론 운동의 초기에는 이것조차 큰 투쟁이고, 전선을 명확하게 하는 소재가 되었지만, 정부가 제공한 제도적 틀 안에서의 문제들만 쟁점화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절실한 산재보험제도의 급진적 개혁,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산업안전보건법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 같은 역사적,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과제가 분명히 있기에, 노동조합이 이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실천할 의지와 역량을 성숙시켜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할 것이다.
운동의 초기에도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노동자 간 격차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현재의 비정규직, 이주, 여성, 영세사업장 노동자가 겪는 건강상의 차별은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총연맹과 산하 조직들이 현재의 건강격차, 노동조건의 격차를 좁혀나가기 위한 운동을 당장 시작하길 기대한다.

5. 글을 마치며

운동의 역사를 좀 더 성실하게 공부하고,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점 송구스럽다. 특히 산재노동자의 조직적 운동이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이에 대해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이 원고를 작성하게 되어 별도의 언급조차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2007년이 가기 전 산재노동자운동의 20년, 소중한 역사를 함께 나눌 기회가 있기를 소망한다. 진심으로.
요즘 들어 노동자건강권 운동 내부에서 토론이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운동의 현재는 어디이고, 운동의 방향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애초 이 원고를 청탁하신 분의 주문은 이 문제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본인의 능력으로는 지난날의 역사를 아주 조금 정리해 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지난날, 밤을 지새며, 공부하며, 토론하며, 지역마다 노동자, 민중의 병원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주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영세공장노동자가 도시의 구석구석에 숨어들어가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그 병원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

우리에게는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언제 어떻게 소멸의 과정을 거쳤는지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다.
잃어버린 운동의 역사를 복기하다보면 지금의 운동, 운동의 나아갈 길이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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