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ㅣ12,1월ㅣ특집3 ] 두원정공 투쟁 되돌아 보기

일터기사

두 번째. 두원정공 투쟁 되돌아 보기

한노보연, 금속노조 경기지부 두원정공지회 이기만

당시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던 두원정공 노동자들에게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 투쟁이었다. 2008년 또다시 우리 노동자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2002년 두원정공 노동자들의 위기는 IMF와 두원정공 생산 품목의 시장 퇴출 이라는 방식으로 다가2현장 참여 연구 사례 왔지만 지금은 세계경제의 위기와 함께 다가오고 있는 것에 대한 차이 뿐이다.

치열한 투쟁으로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스리는 투쟁을 해온 두원정공의 노동자들도 여전히 물량 이데올로기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경제위기로 인한 여파로 물량이 줄고 잔업 특근이 줄어들면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불안감이 가득하다. “이번에도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지금 다시 당시의 투쟁에 대한 되돌아보기를 통해서 또다시 다가오고 있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가야 하는지, 노동자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시도하는 계기를 만들어 간다면 의미 있는 되돌아보기가 될 것 같다.

1. 두원정공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97년 IMF 위기

– 회사는 90년 초부터 환경규제에 의해 전면적 위기가 찾아 올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한때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위기를 돌파하겠다고 의욕을 가지고 연구소를 확대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연구소 인원만 200명이 넘었지만 회사는 돌연 모든 연구 사업을 중단하고 연구소 규모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연구해서 새로운 기술로 돌파하는 것 보다 이미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는 보쉬를 설득해서 기술을 사다가 생산하는 것이 더 이윤을 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 그러나 보쉬는 두원정공에 기술을 주지 않았다. 보쉬는 이미 세계 어느나라에도 합작형태의 투자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영권을 획득하지 않는한 결코 그나라에서 생산을 하거나 기술을 이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두원정공은 환경규제에 의한 위기보다 IMF 라는 경제위기가 먼저 찾아 왔다.

2. 98년 두원정공의 위기

– 98년 경제 위기와 함께 두원정공에도 위기가 찾아 왔다.현장 참여 연구 사례2 매출이 급격히 하락하고 두원그룹은 두원생명의 부실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두원정공에서 발생되는 매출은 모두 그룹을 살리기 위한 비용으로 쓰여 졌으며 노동자들은 임금 체불에 고통 받아야 했다.

– 현장은 더 이상 두원정공이 살아갈 방향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위기는 경제위기에서 오는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환경규제등과 함께 들이닥친 두원정공의 총체적 위기라 생각했다.

– 회사는 98년의 위기를 두원정공의 총체적 위기로 선전하며, 희망퇴직등을 강요하였다. 나이먹은 노동자들이 주요 대상이었으며, 회사는 퇴직금을 중심으로 하는 협박등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지키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 당시 노동조합은 회사의 양보교섭안을 전부 수용하였다. 또한 회사가 강제 희망퇴직으로 현장을 유린하고 있는 것을 묵인하는 것으로 구조조정을 용인하였다.

3. 1999년 / 2000년 / 2001년 / 회사의 일관된 구조조정 정책

– 매출은 99년부터 원상회복 되었지만 회사의 구조조정 방향은 일관되게 진행된다. 98년 위기를 느낀 노동자들은 매출이 완전히 회복된 99년에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서리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회사는 일상적 구조조정 정책을 통해서 2001년 말까지 약 40%의 인원을 정리하게 된다.

– 김찬두 회장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살아났다. 99년 2000년 2001년을 지나면서 김찬두 회장은 두원생명과 두원건설, 두원정보통신등으로부터 발생한 모든 부실을 털어낼 수 있었다.

– 김찬두 회장은 더욱 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인원을 더욱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40%의 인원이 떠나면서 현장은 장시간 노동에 죽도록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원을 더욱 줄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김찬두 회장은 현장에 내려와 현장 작업자들의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분석하였다. 그리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동작들을 찾아내고 쓸모없는 동작을 없애기 위해 라인을 바꾸기 시작했다. 라인은 O 자형과 U자형으로 바꾸어지기 시작했다. 라인 변경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노동밀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자들의 노동 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현장의 인원은 남게 되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화살이 되어 또다시 고용불안 요소로 작용해 갔다.

4. 2002년 노동조합의 반격

– 민주노조가 들어서자 회사는 제일먼저 중장기 매출 계획을 내놓으며, 회사가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환경 규제에 의해 매년 매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매출이 줄어들면 회사는 더 이상 경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회사가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2006년 까지 매년 60명씩 줄여가자는 것이다. 2006년까지 60명씩 줄여가면 나머지 200명 정도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두원정공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회사의 방안이었다. 노동조합이 이 방안을 받기 힘들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희망퇴직을 계속해서 용인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회사가 알아서 정리해 가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 회사가 위기라는 상황속에서 노동조합은 가장 강도 높은 임단협을 준비한다. 민주노조를 깊이 뿌리박고 불안해 하는 조합원들을 노동조합 중심으로 힘있게 모아내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올바로 투쟁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였다.

– 2002년 임단협 투쟁은 노동조합의 완벽한 승리였다. 힘 있는 파업을 통해서 요구 안의 거의 90%에 가깝게 관철해 냈다. 과거의 시늉만 하다가 포기하는 임단협 투쟁이 아님을 현장은 몸으로 느꼈다.

5. 2003년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

– 자본이 이야기 하듯 환경규제에 의한 물량 감소가 구체화 되고 있었다. 2000년 2011억을 정점으로 매출은 매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매출이 줄어들 경우 현장에 인원이 남게 될 것이고 일자리가 없어 남는 인원들이 대안을 요구하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희망퇴직을 통해서 남아 있는 사람만이라도 잔업할 수 있게 하자는 현장의 요구가 강화될 경우 노동조합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2002년 투쟁과 함께 노동조합의 과제는 물량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대응 방향이었다.

– 자본의 물량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노동조합은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을 선택한다. 집단요양 투쟁이야말로 98년 이후 진행된 자본의 구조조정을 전면적으로 되돌리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은 20현장 참여 연구 사례202년 9월부터 집단요양 투쟁 준비에 돌입하여 2003년 1월 집단요양 신청을 출발로 2003년 구조조정에 대항하는 전면전을 치른다.

– 2002년 9월부터 준비에 들어간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은 2003년 1월 20여명의 노동자들의 집단요양으로부터 시작한다.

– 처음 20명이 산재요양 신청을 하면서 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회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겉으로 들어난 외상이 없는 상태에서 요양 승인이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힘 있는 투쟁과 산재 환자들의 헌신적 투쟁은 공단으로부터 전원 요양 승인을 받아내는 값진 승리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 요양승인이 나자 노동조합은 요구안을 마련하여 회사에게 특별 노사협의를 요구하였다. 두원정공에 산재환자가 80%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노동조합 요구를 받지 않는 다면 노동조합은 순차적으로 산재환자들을 집단요양에 돌입하도록 하겠다, 는 것이 노동조합의 핵심적인 방향이었다.

– 오랜 논의 끝에 합의안이 마련되었다. 회사는 최대한 빨리 이 문제를 정리하고 싶어 했다. 집단요양 승인이 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부에 집단적으로 산재환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투쟁하였고 노동부에서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듯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실제로 노동부는 두원정공에 검찰 노동부 합동점검을 나왔고 시정지시서 종합진단명령 임시건강검진명령 공상처리 경위서 작성 명령등을 내렸고 회사는 이런 것들을 처리하고 대응하기 급급해 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더 이상 확산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부담은 노동조합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 노동조합 요구안의 핵심은 회장에 의해서 바뀐 라인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었다. 경제위기를 틈타 40%가 넘는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내몰고 그것도 모자라 더욱 더 철저히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 회장에 의해서 바뀐 라인을 되돌리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핵심적인 과제였고 요구이다.

– 노동조합은 두원정공 전 라인에 대한 현장 개선방향에 대해 현장 조합원들의 의견을 모아 전면적 현장 개선 요구안을 핵심으로 하는 요구안을 만들어 관철시킬 수 있다. 이와 함께 개선위원의 전임 확보, 체조를 작업시간 시작후에 하는 것 휴게시간 연장등을 합의 하였다.

– 개선위원들의 적극적 활동으로 현장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회장에 의해서 구부러졌던 라인들이 다시 펴지고 넓혀졌다. 경제위기를 틈타 몇 배 강화되었던 현장의 노동강도는 자연스런 현장 투쟁과 노동자들의 의지에 따라 다시 재조정 되었다. 현장 개선으로 현장이 바뀌기 전까지 현장에서는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 놓았다. “몇몇 환자만을 위한 투쟁이다” “집단요양 투쟁으로 더욱 일이 힘들어졌다” “회사 망하게 하려는 것 아니냐” “꾀병 환자들을 노동조합이 양산한다” 등등이다. 그러나 자신의 현장이 바뀌면서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의 본질적 의미를 알기 시작했다. 단순히 꾀병 환자를 양산하는 투쟁이 아니라 우리의 현장을 바꾸고 노동강도를 낮추어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임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현장의 전면적 투쟁임을 분명히 인식해 가기 시작했다.

– 집단요양의 소용돌이 속에 2003년은 자본이 구조조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할 여유조차 같지 못하였다. 오히려 현장은 인원이 모자라서 각 부서간 인원확보를 위한 경쟁에 소용돌이 쳤다. 20명의 집단요양 승인이후 숨죽이고 일만하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아픈 몸을 이끌고 조합을 찾아 왔다. 20명으로 출발한 산재 환자는 90명까지 이르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현장은 개선되어지면서 더욱 많이 인원을 필요로 했다. 매출은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지만 현장은 오히려 인원이 모자라서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6. 마무리

– 당시 두원정공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물량은 지속적으로 줄어가고 있었으며, 자본은 두원정공의 미래는 더 이상 없다는 이야기로 위기를 조장하였다. 두원정공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인원정리 뿐이라는 것이다. 물량이 줄어가는 것 만큼 인원을 줄여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회사의 논리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때문에 자본의 이러한 논리를 돌파하고 새로운 투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연구소와의 만남은 두원정공에게서는 중요하고 소중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 물량은 곧 고용이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요즘 현장은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인다. 물량이 급속이 줄어들거나 생산계획이 애초에 잡히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현장의 불안감을 부추긴다. 현장 또한 여전히 물량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량이 없으면 천천히 쉬면서 일하지!” 쉬면서 일하는 것으로부터 노동자들에게 떠넘겨 지고 있는 자본의 위기를 전면적으로 돌파해 나가자.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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