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월/연구소리포터] 증권산업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건강 실태

일터기사

증권산업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건강 실태

한노보연 상근활동가,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

1. 들어가며

2002년
H증권 직원, 영업실적 부진에 대한 질책으로 괴로워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

2003년
C증권사 채권운용팀 직원, 뇌출혈로 쓰러져 1년 넘게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
K증권 직원, 고객접대 도중 뇌졸증으로 쓰러져 산재 인정

2004년
W증권 직원, 과로사
H증권 본사 부장급 직원, 잠시 쉬겠다며 책상에 엎드린 이후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
D증권 인천지역 지점장, 출근 도중 사망
E증권 대구지점장, 40대 초반 나이에 돌연사
G증권 현모씨, 치악산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
S증권 황모씨, 고객과의 마찰과 사채업자 횡포로 고민하다 아파트 19층에서 투신자살

2005년
W증권 이모씨, 회사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유서 남기고 자살
W증권 직원, 과중한 업무 부담과 팀장으로부터의 잦은 질책으로 우울증 산재  61 인정

2006년
H증권 직원, 뇌졸증으로 쓰러져 현재까지 투병 중
C증권 직원, 출근길 도중 협심연구소리포트증으로 사망, 산재 인정
G증권 직원, 뇌출혈과 심장마비로 사망

2007년
H증권 직원, 지주 방침에 따라 계열사에서 전적한 뒤 자택에서 돌연사
H증권사 직원, 업무스트레스로 자살, 산재인정
K선물회사 직원, 지하철역 투신 자살

증권산업 인력 구조조정이 본격화되었던 2004년을 전후로 하여 수많은 증권 노동자들이 과로사와 자살로 죽어갔다. 이에 지난 2007년 전국증권산업노동조합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는 증권 노동자의 노동강도 및 직무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건강과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는 전국증권산업노동조합 소속 10개 지부 중 9개 지부가 참여하였는데, 이번 연구소 리포트에서는 이 중 코스콤 비정규지부를 제외한 8개 지부의 결과를 소개한다. 코스콤 비정규지부는 다른 지부들과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어 별도로 분석하였으며, 이미 2007년 10월호에 먼저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다음 결과는 직무별 면접조사와 1,313명(2006년 12월 기준 조합원 수 3,340명 대비 39.3%)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종합한 것이다.

2. 지금, 증권 노동자의 상태는 어떤가?

1) 고밀도 노동과 스트레스

증권시장 개장시간은 월요일에서 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일 뿐이지만, 폐장 이후에도 증권 노동자들의 노동은 계속된다. 이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에 10.1시간, 일주일에 45.8시간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노동시간의 질이다. 근무 중 짬짬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평균 18.0%에 불과하여 다른 산업에 비해 매우 여유가 적다. 특히 개장 중에는 영업직, 관리직을 막론하고 식사 시간조차 제대로 챙기기 어렵다. 노동조건의 변화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업무의 양과 종류, 속도 등의 증가가 가장 두드러졌다. 직무스트레스 요인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업무량이나 업무 종류가 많거나 시간에 쫓기고 업무에 대한 부담이 과도할 때 발생하는 직무 요구 영역에서 전국의 다른 산업 노동자들에 비하여 높은 수준을 보였다.

이러다보니 노동자들이 느끼는 노동강도가 센 것은 당연하다. 현재 자신의 노동강도가 적절하다고 느끼는 노동자의 비율은 4분의 1에 미치지 못하며, 업무를 마치고 난 뒤 60%는 육체적인 소진감을, 80%는 정신적인 소진감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다. 각종 노동강도 지표들을 다른 사업장들과 비교해보면, 평균 30대 초반인 증권 노동자들이 느끼는 노동강도는 평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생산직 노동자들이 느끼는 노동강도 못지 않다.

요약하자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증권 노동자들의 노동 실태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고밀도 노동이다. 게다가 고밀도 노동은 각종 건강 지표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보이고 있어 증권 노동자들의 건강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2) 건강과 일상의 훼손

증권 노동자들 중 84%는 중등도 이상의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들의 피로 원인은 대개 일과 관련된 것이다. 만병의 근원이 되는 만성 피로 뿐 아니라 실제 건강 지표 또한 심각하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의 증상자 36%를 포함하여 약 75%의 증권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증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90% 이상이 자신의 증상과 업무의 관련성을 자각하고 있다. 정신 건강의 위험을 뜻하는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측정 결과, 건강군은 1.6%에 불과한 반면 약 44%가 고위험군으로 나타났으며, 19% 가량은 중등도 이상의 우울 증상을, 약 34%는 상당한 수준 이상의 불안 증상을 가지고 있다.

만성 질환들의 유병률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위십이지장궤양이나 고지혈증, 알레르기성 비염이나 아토피성 피부염 및 피부 알레르기 등 노동조건이연구소리포트나 스트레스와 관련이 높은 질환에서 전국의 일반 성인들보다 높은 유병률을 보였다. 비교를 위해 참고한 전국의 일반 성인들 중에는 노인이나 빈곤층 등 증권 노동자들에 비해 사회경제적 조건이 열악한 집단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서, 증권 노동자들이 처한 고밀도 노동과 직무스트레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질병명 환자 수 유병률 전국 성인 유병률

빈혈 80 60.9 50.3
위십이지장궤양 104 79.2 36.8
만성간염 23 17.5 10.7
고지혈증 73 55.6 29.0
만성부비동염(축농증) 39 29.7 28.7
기관지확장증 7 5.3 2.0
알레르기성 비염 161 122.6 83.1
악관절질환 29 22.1 6.3
아토피성피부염,피부알레르기 105 80.0 70.1

대부분 증권 노동자들은 출근하지 않는 휴일에 주로 TV를 보거나 밀린 잠을 자거나, 가사 노동을 하면서 보낸다. 이들이 문화 생활이나 취미 활동을 하면서 여가를 보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일상 업무로 인한 피로 때문이다. 고밀도 노동에 의해 피로가 누적되다보니, 노동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 즉 일상 전체의 질이 저하되는 것이다. 약 24%는 출근하지 않는 날 스포츠나 레저 활동을 한다고 하나, 건강 유지에 효과가 있을 만큼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경우는 13%에 불과하여 운동조차 자신의 건강 유지가 아니라 고객관리를 위한 업무의 연장선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행복한 상태”로 정의한다. 노동자 권리의 측면에서 이를 다시 풀어 쓴다면 육체적 건강이란 다치거나 병들거나 죽는 등 이윤을 위해 희생되지 않을 권리를, 정신적 건강이란 수많은 질병을 일으키는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노동조건에 대해 노동자 스스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자율성과 통제권을 가질 권리를, 사회적 건강이란 정치‧경제‧문화‧교육‧의료 등 모든 사회적 권리를 골고루 누릴 권리를, 그리고 영적 건강이란 사상이나 종교, 이념적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하며 조직할 모든 권리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증권산업 노동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건강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라고 하겠다.

2. 증권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제언

증권 산업의 쉼없는 구조조정과 현장 통제는 증권 산업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직무스트레스를 강화시키고, 삶과 건강을 훼손해왔다. 자본 운동의 한복판에 있는 증권 산업의 고유한 특성과 최근 증권 산업을 둘러싼 안팎의 변화들로 미루어 볼 때, 증권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스트레스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세계 제일의 노동 몰입도를 자랑하는 일본에서 1960년대 말 어느 노동자의 돌연사를 계기로 세계 최초로 과로사(Karoshi)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자 고강도의 업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여 자살하는 소위 과로자살(Karo Jisatsu) 현상이 보고되기 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보자. 노동의 장소와 형태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노동에 몰입하고 성과를 위해 매진하는 것은 노동자의 신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명백하게 확인시켜 주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외환 위기 이후 고도의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의 결과로 근골격계 직업병, 뇌심혈관계 질환, 정신 질환 등이 심화되면서, 노동재해나 직업병이 물리화학적인 위험 요인에 노출되는 생산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다양한 산업 및 부문에서 일하는 이들이 대부분 이미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음이 여러 연구들을 통해 확인되어왔다.

따라서 더 이상 노동자의 몸과 마음, 일상과 삶 전체가 훼손되기 전에 노동강도를 낮추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되찾기 위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 변화란 지금까지 증권 산업에 일상화된 구조조정으로 악화되어온 노동조건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이후 예상되는 구조조정에 맞서기 위한 발판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1) 노동강도 저하를 위한 첫 걸음 – 제대로 쉴 수 있는 권리를 되찾자

특히 이번 조사 결과가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밀도를 조금이라도 낮추는 것은 매우 시급한 문제이다. 노동밀도를 낮추기 위한 인력, 업무 배분과 실적 설정, 임금 구조 등에 대한 정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숨좀 돌려가며 일할 권리”와 “제대로 쉴 권리”를 되찾아, 마땅히 향유해야 할 건강권을 쟁취하기 위한 대중의 요구를 조직하고 일상적인 직접 행동을 통해 소박하더라도 구체적인 성과를 남기는 과정도 절실하다.

“쉴 권리”를 위한 싸움의 일차 목표는 근무시간 중에는 단 10분이라도 ‘온전히’ 업무를 벗어나 쉴 수 있는 권리를, 주말이나 휴일에는 각종 교육 등으로 원천봉쇄 되어온 쉴 권리를 되찾아 오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지부를 막론하고, 본사건 지점이건 노동자들이 제대로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실질적인 휴식, 개별화되지 않고 집단적으로 함께 쉴 수 있는 휴식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휴일에 진행되는 교육 일정을 사전에 줄이기 위한 교섭상의 노력, 그리고 휴일 교육에 대한 집단 거부 등 보다 대중적인 직접 실천을 시도해야 한다. ‘업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라는 증권노동자 내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증권노동자의 몸과 삶이 필요로 하고 누려야 할 권리들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쩔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장벽은 없다. 증권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필요와 요구에 기초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2) 일상 노동보건 활동을 강화하자

증권산업노동조합 전체의 통일된 목표와 실천 뿐 아니라, 각 지부와 직무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해있는 증권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낮추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한시적인 조사 사업이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상태와 요구를 파악할 수 있는 기제를 발굴하고 시도해야 한다.

증권노조와 각 지부는 조합원의 건강증진에 대한 내용을 단체협약 속에 포함시켜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좀더 값비싼 건강진단을 실시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건강진단은 노동자의 건강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여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건강이 더 심하게 망가지기 전에 빨리 발견하여 치료받는 사후 대응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강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 즉 예방이다. 예방은 특정한 시기나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상 노동보건활동의 강화야말로 진정한 예방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 노동보건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각 지부별로 노동보건 문제를 담당할 간부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구체적인 역할을 수립하고, 실질적인 일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각 지부와 산별노조의 역량 배치와 사업 계획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증권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임금체계, 구조조정, 정부정책 등에 대한 투쟁과 함께, 증권 노동자들이 마땅히 보장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적용이 배제되어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투쟁도 포함된다. 일상활동 강화와 산별노조로의 단결을 통하여, 그동안 이윤을 위해 빼앗겨온 노동자의 건강권을 되찾아 지키는 한 걸음을 내딛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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