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ㅣ03월ㅣ새세상열기-주거] 3편 기억해내야 할 꿈, 살만한 집에 살 권리

일터기사

기억해내야 할 꿈, 살만한 집에 살 권리
– 주거권과 주거공공성의 열쇠는 우리에게 있다 –

인권운동사랑방 미류

학교에 나가려고 머리를 감던 중이었다. 샴푸 거품을 잔뜩 묻히고 헹구려는데 갑자기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침 한 시간 동안만 더운 물이 나와 밥 먹는 것을 포기하고 줄을 서 들어간 욕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서울에 와서 구한 첫 하숙집, 그 곳에서 나는 ‘집’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게 된 듯하다. 물론 초등학교를 네 번이나 전학 다녀야 할 정도로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집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는 있었겠지만 그때는 ‘집’이 참 먼 얘기였다.

요즘은 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다. 엄마가 얻어준 전셋집에서 남은 임대차계약 기간과 내리지 않는 집값, 내 나이 등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는 것을 생각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어느 순간 집은 짐이 되어 뒷머리를 묵지근하게 잡아끈다. 집과 짐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주거권? 주거권!

모든 사람은 살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많은 인권 문헌들은 주거권을 빼놓지 않고 다룬다. 사람답게 살 권리가 인권이므로 집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주거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심지어 ‘주거권’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인데도.

흔히 집을 그릴 때 사람들은 네모 하나에 세모 하나를 얹는다. 벽이 있고 지붕이 있고 창문과 문이 있는 공간. 지붕은 비를 막고 태양으로부터 적절하게 빛을 가려야 하고 창문은 빛을 적절히 들여와야 하고 바람이 잘 통해야 하고 벽은 외풍을 막으면서 단단해야 하는, 나름 까다로운 조건들이 집에 요구된다. 그런데 그 안에 사람 하나를 그려 넣어 보자. 그 사람은 지친 몸을 뉘어 쉬고 있거나 식구들과 밥을 먹거나 뒹굴거리며 책을 읽거나 더운 물로 몸을 씻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집은 적당한 넓이여야 하새세상열기 세번째 이야기/기억해내야 할 꿈, 살만한 집에 살 권리고 전기가 들어와 불도 켜고 냉장고도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식구 수에 맞춰 방도 있어야 할 테고 난방도 되어야 하며 물도 잘 나오고 하수구로 잘 빠지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혹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가. 온갖 옷가지와 집기와 가구들을 박스에 쌓아놓고 필요할 때에 꺼내 쓰고 있는가. 집 하나 마련했다고 밥을 굶거나 아이들 학교에 들고 갈 준비물을 안 사주고 있는가. 아마도,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살만한 집은 사람과 삶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살고 싶은 동안 살 수 있도록 거주가 보장되어야 하고 자신이 부담할 수 있는 정도의 주거비를 들여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은 주거권의 중요한 요소다.

한국의 주거권 현실

그림 밖 현실로 나와 보자. 한국 사회에는 살만한 집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여전히, 너무나 많다. 아마도 당신은 노숙인을 떠올리고 있을 수 있다. 그/녀들은 지붕조차 없는 거리에서 하루하루 잠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들 중 일부는 작은 일자리라도 구해진다면 쪽방을 찾아든다. 월세가 싸지는 않지만 보증금 없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곳으로 고시원이 있다. 전국에 얼마나 많이 흩어져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누군가 살고 있는 곳이다. 좁은 방, 화장실이나 부엌과 같이 꼭 필요한 공간들도 마음 편하게 쓸 수 없고 옆 집(방) 사람이 코고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하는 곳. 조금 낯설지만 비닐하우스 촌도 있다. 네모난 벽 대신 아치형으로 비닐을 덮어놓은 설치물 안에 아기자기하게 살림이 들어앉은 집들, 하지만 언제 화재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지 모르고 주민으로 인정되지도 않는 동네다.

개발이 추진되는 동네에서도 주거권은 위태롭다. 개발이 무엇인지, 언제 되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도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동네 분위기가 달라진다. 낯선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며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두세 달 안으로 모두 이사를 가야 한다는 얘기가 오가고 이삿짐 나르는 차가 줄지어 동네를 나선다. 이사 갈 곳을 알아보느라 이 동네 저 동네 발품을 팔아보지만 보증금 빼서 옮길 곳이 마땅치 않다. 앞은 캄캄한데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주거권의 침해다. 물론 살던 집에서 아무런 재정착 계획도 보장받지 못한 채 쫓겨나고, 옷가지도 챙겨 나오지 못한 집이 눈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봐야 하는 강제퇴거는 너무나 명백한 인권침해다. 하지만 쫓겨나는 순간만 볼 일이 아니다. 과연 평화롭고 안전하게, 편안하게 집에서 살고 있는가, 그래서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주거권이다.

당신도 다르지 않다

이쯤 해서 당신의 집과 당신이 자꾸 눈에 밟히지는 않는가. 어쩌면 당신은 이미 변두리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했을 수도 있고, 다섯 번째 이사한 지금의 전셋집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이 손에 잡히는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당신은 일을 시작하고 10년 동안 차곡차곡 부은 청약통장을 빙그레 바라보며 반지하 셋방의 눅눅함을 달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저축보다 빨리 불어나는 빚 때문에 지금 사는 월세방에서 최대한 오래 머무를 수 있기만을 바랄 수도 있다. 장마철이면 비가 새서 몇 차례 방수 공사도 해봤지만 해결이 안 돼 이사 갈 마음을 먹고 있을 수도 있고 도시보다 일찍 계절을 맞는 옥탑방에서 땅으로 내려갈 날만 손꼽아보는지도 모른다.
지금 어떤 집에 살고 있든지, 집주인이 갑자기 월세나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해서 급하게 돈을 구해보거나 결국 다른 집을 알아봐야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불편한 점들을 해결하려면 결국 돈이 들어서 꾹꾹 참다가 익숙해진 경험도 있을 것이다. 살고 있는 동안 마음 놓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유의 안정성’이나 집값 때문에 살림살이를 비끄러매지는 않아야 한다는 ‘주거비의 지불 가능성’과 같은 주거권의 요소는 권리로 인식되기도 전에 박탈당해온 것이다.

살만한 집보다 팔릴 만한 집을 짓는 사회

한 해에도 수십만 채의 집이 지어지는데 왜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만한 집에 살고 있지 못한 것일까. 우리들 중 직접 집을 지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집을 짓는 데에는 다양한 종류의 숙련된 기술도 필요하거니와 땅이나 건축자재를 마련하는 데에 드는 돈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 보니 집 짓는 일은 ‘남’의 손에 맡겨져 있는데, 누구나 알다시피 그 ‘남’은 건설자본이다. 근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작은 규모의 ‘집장수’들이 하던 일이 급속하게 산업화되었고 특히 건설 산업으로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개발독재 정권 아래서 건설자본은 한국 경제의 거대한 암초로 몸집을 불려왔다.

암초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건설자본은 사람들이 살만한 집을 짓는 게 아니라 팔릴 만한 집을 짓는다. 그래서 지금 누구나 걱정하는 미분양 아파트 문제도 발생하는 것이다. 살만한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정도만 있으면 될 텐데 집 지어 돈 벌어보겠다고 달려드는 이들이 많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규모가 크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건설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고 수준인 나라다. 건설투자 비중도 매우 높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래서 IMF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가 건설경기를 활성화하겠다며 각종 규제를 완화해 집값을 한껏 올려놓았던 것이다. 건설업이 흔들리는 건 상상을 못하니 늘 안절부절 건설업 살리기에 부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다. 최근 미국의 집값이 최대치로 하락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전 세계적 경제위기를 맞아 부동산 거품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건설경기 부양만을 외치고 있다. 물론 건설사 출신에다가 ‘삽질’을 선호하는 경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각종 규제 완화는 경제를 더욱 위태롭게 몰아가고 있다.

당신의 통장과 부동산 정책 사이의 거리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지어지는 집들에 들어가 살 순서가 우리에게까지 돌아올까.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 동안 지어진 집들 중 집 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간 집은 절반도 안 된다. 대부분 다주택 소유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팔릴 만 한 집, 가능하면 비싸게 팔릴 만한 집들만 지어대는 건설자본과 집이 몇 채든 가진 만큼 집을 사들일 수 있는 부동산정책이 우리로부터 집을 빼앗아가고 있다. 건설노동자들이 우리가 살만한 집을 짓고 싶지 않아서 그렇겠는가. 아니다. 노동력이든 노동수단이든 각종 재료든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해 독점당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의 주거권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자원이 자본의 이윤을 높이는 데에만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자본금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는 것쯤도 우리는 모두 안다. 그동안 수많은 주민들을 내쫓고 땅을 갈아엎어 벌어들인 돈이며 다단계 하도급의 노동 착취와 각종 비리까지 덧붙여 만든 돈이다. 그마저도 일부일 뿐, 국민주택기금이나 각종 금융권의 대출 등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돈들을 건설자본에 몰아주고 있다.
건설경기와 관련된 각종 규제 완화 정책들이나 종부세, 양도세 등의 세금 정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삶과 가까이 있는 정책들이다. 집을 더욱 많이 짓기 위해 재개발, 재건축 규제를 완화하면 단순히 집이 많이 지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동네에 살아서 쫓겨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새로 지어지는 ‘비싼’ 집값을 쫓아가기 위해 인근의 집값들이 모두 오르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럭저럭 지낼 만한 집들이 비싼 집들에 밀려 사라져버린다. 집이 많이 지어지면 각자 들고 있는 청약통장이 집으로 변신하는 날이 가까워질 것도 같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다. 비싸서 집이 팔리지 않으면 집값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집값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거래에 대한 각종 규제가 완화될 뿐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주택정책은 이 틀을 벗어나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세금 문제도 단순히 집 많은 사람들의 ‘도덕’에 대한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투기에 대한 사회적 지탄쯤은 가뿐히 무시하는 분들도 무섭지만, 그 뒤편에서 투자라는 이름으로 집이나 땅을 사들이는 데에 열심인 사람들은 더욱 무섭다. 자신이 직접 거주하지 않을 목적으로 집을 사는 것 자체는 문제되지도 않는다. 그 집들은 우리가 살만한 집에 살 권리를 박탈당한 대가로 그들에게 주어진 전리품인데 우리는 이 전쟁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내 집 마련의 꿈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가난할수록 내 집 마련의 꿈은 절박하다. 설령 전쟁의 실체를 우리가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각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싼 동네를 알아보거나 할 수 밖에. 그동안 우리는 정작 우리의 꿈을 놓칠 수도 있다. 1년에 한 번은 여행을 다니거나 다루고 싶은 악기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닌다거나 주말마새세상열기 세번째 이야기/기억해내야 할 꿈, 살만한 집에 살 권리다 영화를 보거나 직접 영상을 찍어보겠다는 꿈들. 어쩌면 그런 꿈조차 너무 멀어 하루하루 밥상에 오르는 음식들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내 집 마련의 꿈’이 우리의 꿈을 저당 잡는 상황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집이 만들어지는 구조에서는 주거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우리들 모두 ‘내 집 마련’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이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바로 지금 누려야 할 권리들이 유예될 뿐이다. ‘검은 영혼의 시인’이라 불리는 랭스턴 휴즈는 “내일의 빵으로는, 나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집도 마찬가지다. 내일의 집에, 우리는 살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늘 살만한 집이 필요하다.

임대료는 우리가 부담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인상할 수 있도록 하고 불가피하게 그 이상 올려야 할 경우 지자체에서 부담하도록 하자, 집주인이 직접 들어와 살 경우가 아니라면 세입자더러 나가라고 할 수 없도록 하자, 너무 낡은 집을 수리하거나 다시 짓는 데 필요한 돈은 지자체가 부담하자, 동네가 워낙 낙후해서 기반시설부터 다시 깔아야 하는 경우라면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공공의 지원으로 천천히 동네를 바꿔보자……. 꿈같은 얘기인가.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직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의 꿈을 찾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이 정도는 이미 다른 나라들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들이다. 우리의 꿈은 그걸 넘어설 수도 있다.

기억해내야 할 꿈

출발선은 집은 인권이라는 것. 누가 집이 필요한지를 묻자. 여성이라고, 장애가 있다고, 혼자 산다고 집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재산이 없다고 소득이 적다고 집이 필요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반면, 제한된 땅과 자원을 고려할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필요한 만큼만 누리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헤아려졌다면 그/녀들이 들어가 살만한 집을 지으면 된다. 새로 짓지 않고 이미 지어진 집들을 나눠가져도 된다. 땅과 노동과 집을 끊임없이 사유화하려는 구조에 맞서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만들어가새세상열기 세번째 이야기/기억해내야 할 꿈, 살만한 집에 살 권리는 것이 바로 주거공공성이다.

집이 필요한 사람이, 살만한 집에 살 수 있도록 집을 짓고 나누는 일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한국 땅에서는 세상을 뒤엎을 꿈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무슨 대단한 꿈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집값이 싸고 살기 좋은 동네와 집을 찾아 헤매는 시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동네를 싸고 살기 좋고 오래도록 살 수 있게 만들 궁리를 시작하면 된다. 내 자식한테만은 집 한 채 남겨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을 둥 살 둥 일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살만한 집에 살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더 간단한 일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된다. 사람답게 살 권리, 살만한 집에 살 권리를 향한 우리의 오랜 꿈, 미처 깨닫기도 전에 봉인되어 버렸던 꿈을 기억해 내면 된다.

3일터기사

댓글

댓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정보통신 운영규정을 따릅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