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 04월 | 일터다시보기] 너희는 안타깝냐, 우리는 미안하다!

일터기사


너희는

안타깝냐,

우리는 미안하다!




한보노연 선전위원 최 종 배


삼성 노동자 박지연씨가 3월 31일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삼성은 직업병이 아니라고 하지만, 전자산업이 가지는 ‘클린’이란 이미지의 정체를 알고 보면 전자산업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한 집단적인 백혈병과 림프종, 뇌종양 그리고 각종 암은 명백한 직업병이다.

‘클린’의 뜻은 ‘깨끗한’, ‘더러움 없는’의 뜻이다. 그런데 이 뜻이 느닷없이 ‘안전한’, ‘최첨단의’ 란 뜻으로 사람들에게는 둔갑되어 받아들여진다. 이는 정교한 이미지 조작의 결과이다. ‘클린’은 삼성전자의 제품인 반도체 생산에 최적의 환경을 의미하는 ’먼지없는’을 의미할 뿐이다. 사람에게 유해한 가스가 전체 공정에 번져가도 반도체 생산에 적합한 ‘클린’이다.

반면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노후된 설비의 잦은 고장 속에서도 생산을 위해 안전수칙과 안전장치마저 해제하는 야만적인, 결국 죽음을 부르는 노동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삼성이 원하는 그 무엇을 위해 노동자들은 치명적인 각종 화학용제 및 누출가스에 노출되고, 중금속 물질을 첨가 과정에서 흡입하거나 피부에 접촉되고, 고농도의 방사능에 수시로 피폭되는 등 결코 ’안전하지 못한‘, ’낙후된‘ 생산라인에서 생계를 위해 어린 여성들이 일을 해야 했다.

(일터 2009년6월호9쪽 산재불승인 사건에 대한 반올림 성명)

삼성반도체 담당자는 “산업재해는 이미 공단에서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결정났고, 화학물질 사용 관련해서도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다. 역학조사는 전문가들이 하는 거다.”며 박지연씨의 사망에 대해 “안타깝다”라고 했다. 반면 삼성전자 피해자들의 치료받을 권리와 그 가족들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함께 해온 연대동지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연대동지들의 ‘미안하다’는 말은 고 박지연씨의 삶과 생명을 지켜주지 못해, 힘이 부족해서 직업병으로 인정받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 회복하게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것에 대해 고인에게 미안하다는 의미이다. 그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뜻이다. 박지연씨는 반도체 검수 일을 했다. 도금이 잘 입혀지도록 플럭스(flux) 용액과 고온의 납 용액에 반도체 본체를 핀셋으로 잡고 넣었다 꺼내는 작업을 했다. 방사선이 발생하는 엑스레이 기계로 제품검사를 하기도 했다. 생산물량을 맞추기 위해 엑스레이 기계의 안전장치를 끄기도 했고, 보호장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화공약품과 납용액을 다루며 유증기를 흡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성직원의 ‘안타깝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근로복지 공단이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만 두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업안전공단에서 실시한 역학조사 결과 유해물질과 유해공정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직업병이라 주장하는 것을 제발 그만 두라는 뜻일 것이다. 어린 딸의 고통과 죽음을 겪는 유가족에게 전하는 삼성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삼성은 2007년 산업안전공단의 역학조사 직전 생산라인을 뜯어 고쳤다. 삼성이 발암물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산업안전공단이 발표한 것과는 정반대로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을 삼성이 사용했음을 서울대조사팀이 밝혀냈다.

노동자의 몸과 삶에 미치는 흉폭함과 기만성이 삼성에게만 있는가? 그런가? 그렇다면 이 나라의 노동현실을 살펴볼 만하다.

우선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천 시간이 넘는다. 10년째 29개 OECD 국가들 중에서 2위와는 400시간 이상의 차이로 부동의,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발표를 보면 2001년 2천447시간, 2005년 2천351시간, 2007년 2천316시간이다. 잔업, 특근, 야근 등을 통해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정리해고와 노동유연화를 경험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한편으론 건강과 삶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겪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고 있다.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본은 ‘마른 수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토요타의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 잔인함에 주저하지 않는다. 때로는 비용절감을, 때로는 품질을, 때로는 경쟁력을, 때로는 CS를 내세우며 이미 한계에 다다른 노동자에게 남아 있는 기름 한 방울마저 쥐어짠다.

“고용을 지키려면 이 정도 쯤이야 견뎌야지, 안 그래?”

“몸이 망가지더라도 있을 때 확 땡겨야지.”

“너만 아프냐,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일터 2010년3월호19쪽)

“5시 40분에 일어나 6시20분 출근버스를 탄다. 9시 퇴근버스를 타고 퇴근 후에는 인터넷이나 영화를 보다가 12시30분쯤 잔다. 자는 시간이 모자라서 버스만 타면 기절했다가 내릴 때가 되면 저절로 깬다. 수요일만이라도 5시에 퇴근 하는 게 위안이다.”

“꿈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꿈은 솔직히 지금 없어요… 이거는 오로지 지쳐가는… 21시에 퇴근해서 무슨 자기개발입니까?” (일터 2010년3월호56쪽 금속현대차 연구직노동자)

“법정에서 속기하는 중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법정에서 쓰러져야 하는데 꼭 법정이 아닌 다른 데서 쓰러지는 게 문제예요… 잠을 자려고 누웠더니 잠이 안 오는 거예요 통증 때문에 잠을 어떻게 겨우겨우 잤는데 통증 때문에 잠이 깨는 거예요.”

(일터 2009년6월호 60쪽부터. 법원 속기노동자)

노동자들이 이렇게 말하며 자기 위안을 가지고 견딘 끝에는 ‘골병’이라 불리는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며 소진되어 가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 돌연사의 증가, 각종 만성 직업병의 만연, 사고 및 사고사의 증가로 이어지며 노동자의 건강과 가족의 삶과 일상을 황폐화시키고 절단 내고 만다.

자본이 자행하는 흉폭함은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는다.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고강도의 장시간 노동 속에서 질병을 얻고 죽어 나가는 것은 국가가 자본을 비호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본과 정권은 2008년7월 산업재해보상법을 개악했다. 그들은 공범이다

자율안전관리제도를 살펴보자.

대우조선해양에서는 2009년에만 6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관리감독을 받아야 할 의무조차 면제하고 있다. 2010년 들어 3명의 노동자가 또 사망했다. 사망사건이나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작업중단이나 작업장에 대한 안전점검 없이 그대로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것은 ‘자율’이란 이름의 생소한 제도로부터 비롯된다. 중대재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조선업종을 대상으로 자율안전관리제도를 부여해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은 도외시한 채 생산제일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정부의 친 자본정책이 결국 죽음의 행렬을 끝없이 이어지게 한다.

(일터 2010년2월호 10쪽)

질병판정위원회는 또 어떤가?

전국 6개 지사에 설치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노동자의 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 아닌지를 심사해 산재보상 여부를 심사하고 결정한다. 2008년7월 법이 개정면서 질병판정위원회가 도입됐다. 그 전에는 공단이 자문의사협의회의 의견을 수렴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발병원인,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 정도 등 전문적인 조사와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에 설치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전문가 집단의 판단’인 질판위의 결정을 앞세워 공단의 책임을 회피하고 재해노동자의 권리 구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자 도입한 것이다. 1건당 10분도 채 못 되는 심의에 ‘전문가들의 판단’이라며 불승인을 남발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 질판위 도입 후 불승인율이 높아졌다.(특히 뇌심혈관계질환와 누적성 질환) 질판위는 사고에 준하는 질환이 아닌 누적성 질환에 대해서는 퇴행성을 이유로 불승인 처분을 더 남발하고 있다.

(일터 2009년4월호 20쪽부터)

노동현장에서 위험이나 재해로부터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진 국가가 그 책임을 도외시한 채 오히려 각종 법과 제도를 통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음을 볼 때 자본의 흉폭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은 참 쉽다

“6월 둘째 주일은 우리 교회의 어린이 날이다. (줄임) 우리 일본의 어린이들은 천황의 적자요 국가의 자녀이다. 이 나라에 나고 자라고, 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또한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어린이들은 군국(君國)을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천황의 적자인지라. 언제든지 황송하고 감격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전자는 ‘민족적 고난의 시기에 교육의 초석을 다지고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인재양성에 매진한 교육계 인사들’ 중 하나로 분류되는 백낙준이 1942년3월3일 기독교신문에 사설로 실은 글이다. 후자는 박목월 시인이 1930년대에 발표한 <나그네>라는 서정시다.

백낙준의 글은 재고의 여지 없이 노골적인 친일을 보여주고 있다. 박목월의 시가 평화로운 1930년대의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그린 것인지 점검해 보자. 그 당시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필요한 전쟁물자 충당을 위해 집집을 뒤져서 놋그릇, 수저, 대야 등 집기는 물론 식량마저 빼앗아가는 통에 조선사람들은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연명하기도 어려운 때에 남아 도는 쌀이 있어 온 마을에 술이 익어 가는지, 시로 노래할 만큼 그렇게 한가롭고 평화로운지… 괴롭다.

삼성전자에는 노동조합이 없어서 무슨 유해물질을 쓰는지도 모르고 각종 화공약품에 상시 노출되고 방사선에 피폭되어가면서도, 생명을 걸고 시키는 대로 일했다.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어용노동조합이라면 백낙준 같은 역할을 하며 죽음의 구렁텅이로 노동자를 몰아갈 것이다.

과연 노동조합이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알려내는 역할을 진심을 담아 실천하고 있는가?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각성과 투쟁을 가로막게 된다. 많은 지식과 정보가 모여드는 곳이 노동조합이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노동조합을 보며 조합원들은 오히려 암울해지고, 방향을 잃고 만다. 노동조합의 제대로 된 역할 중의 하나는 현실을 정직하게 전달하고, 그 의미를 해석·제시하여 조합원 대중의 분노를 조직하는 일이다. 노동조합의 용기와 실천이 그 돌파구를 만드는 열쇠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신데렐라에게 새 엄마가 말했다. “만약 네가 할 일을 다 한다면 무도회에 갈 수 있다.” 새 엄마는 ‘만약’이라고 전제를 달고 신데렐라에게 감당하기 불가능한 일을 맡긴 채 새 언니들과 함께 무도회장으로 출발했다. 새 엄마의 지시대로 일을 하던 신데렐라가 기력이 다하여 쓰러져 울고 있을 때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타나 신데렐라를 도와주고 신데렐라는 무도회에 갈 수 있었다.

삼성노동자들에게 요술쟁이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골병이 들어 쓰러진 ‘착한’ 신데렐라에게는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타났다지만, ‘뼈 빠지게’ 일하는 이 땅의 노동자의 생명과 삶을 사고나 질병으로부터 지켜줄 요술쟁이 할머니 같은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해마다 3천 명 가까운 노동자가 생명을 잃어도 ‘별 일 아닌’ 자본과 정권에게 안전한 노동현장을 만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들은 적절한 치료와 보상으로 재해노동자의 생명과 가족의 삶을 보호하기는 커녕 그저 “안타깝다”라고 할 뿐이다. 해마다 10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의 신체가 훼손되고, 노동능력 상실 및 치료비와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가난과 절망의 고통에 빠져도 ‘할 만큼 다한’ 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미안함’을 느끼는 자가 스스로 단결하고 연대하는 길 밖에 없다. 단결과 연대. 단결과 연대.

2일터기사

댓글

댓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정보통신 운영규정을 따릅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