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ㅣ12월ㅣ노안활동가에게 듣는다] 안으로부터, 밑으로부터

일터기사

안으로부터, 밑으로부터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 국장 –
▴정리 _ 선전위원 타래

노장(?) 활동가조차 노안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창원에 이은주를 찾아가보라고 한다. 전설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감격과 회한이 뒤섞여 범벅이 된 역동적인 드라마……
언젠가, 남산골 선비의 방 마냥 소박하고 정갈한 그의 방에서 개다리소반을 사이에 두고 밤늦게 까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로 듣는 편이다. 기대했던 감격적인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지금의 감격 없는 현실에 한탄하는 필자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
아무런 이야기도 못 쓸 것 같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속에서 천천히 여물어가고 아래서 조용히 움트는 그것이 역사고 전설이다. 그는 역사라기보다는 그보다 더한 현재인 것 같다.

노안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산재추방운동연합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노안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4년, 산추련 전신이었던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모임”이라고, 마창지역 산안부장들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상근활동을 했었다. 처음 할 때는 노안에 대해서 잘 몰랐던 시기이지만 건강권이나 안전이라는 문제가 현장통제라는 문제와 가장 밀접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열 몇 명 되는 산안부장들 모여서 동향을 주간자료로 만들어서 읽고 토론하는 게 주였고 내가 있으면서 모임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지역에 ‘노동자건강을위한모임’이라고 보건의료인들이 활동하는 단위와 마산에서 사무실을 같이 썼는데 통합하자는 이야기가 늘 있었다. “우리가 흡수통합 해야지.” 이런 농담주고 받으면서.
그러다 94년도 조직통합을 결정하고 95년도에 여기 사무실로 이사를 오면서 ‘노동과 건강을 위한 연대회의’로 조직통합을 했다. 소식지도 그때부터 현장에서 올라오신 분들이 만들기 시작했는데, 당시 글 쓰는 것이 현장동지들에겐 어려우니까 서너달에 한 번씩 나왔다. 그래도 원칙으로 삼았던 건, 현장동지들이 글을 써서 생동감 있는 글들이 나와야 하는 거고, 거기 안에서 자기가 주체라는 생각 가져야 한다고 것이었다.
그 후 산재추방운동 10년이 되던 99년에, 그 당시에 전국에 있는 노동보건 단체를 통합해 전국적 단일조직을 건설해서 산재추방운동의 활동의 내용을 강화시키고 확산시키자는 취지로 전국단위의 산재추방연합이 출범했고 우리 이름이 ‘노동건강연대’에서 ‘산재추방운동연합’으로 바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국적 단일조직은 건설되지 못했는데 산재추방운동연합 통합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평가하기가 생각의 차이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추구할 것인가가 달랐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근골 문제나 이런 건 굉장히 민감하기도 하고 다른 입장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산재추방연합 만드는 거에 대해서 반대하는 기운이 많았다. 그 당시 주요하게는 우리는 현장중심의 사고가 훨씬 컸던 거고. 서울은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집중돼 있기 때문에 정책이랄지 이런 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가 컸던 거고, 이상관 투쟁에 대해서도 관점이 달랐었다.
첫 사업이 이상관 투쟁이었는데 조직체계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터진 것이다. 이 싸움을 하면서 서로에게서 극복할 수 없는 차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이상관 투쟁 끝나자마자 산추련이 해산을 했다.

조직 전망에 대한 고민은 무엇인가?
5,6년동안 산추련이 계속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매회 총회 때마다 이어졌다. 왜냐하면 민주노총이 합법화 된 후에 노동조합 밖에서 연대하고 활동하던 것들이 다 흡수돼서 거의 살아남은 단체들이 없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자체도 그것의 부속처럼 되어가는 경향들이 있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조직 전망에 관한 논쟁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노동조합이 합법화되고 민주주의가 확장돼서 일정한 힘을 갖춘 것은 있지만 더 많은 양극화와 더 많은 현장의 노동자들은 권리가 박탈되고 있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안아야 하는가, 산추련의 기본정신으로 그것을 어떤 사업으로,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상이 분명하게 안 잡히는 게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회원들도 다 정규직이고 대다수의 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안정화된 것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뛰어넘어서 그동안의 해왔던 활동방식이나 조직운영구조나 이런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데 우리 안에 그런 내부동력이 있는가, 이런 고민들이 있었다.
지금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동으로 보면 2년 정도 됐고 2년 동안은 그전의 비정규직 문제로 고민하던 것, 발을 못 디딘 것에서 한 발씩 구체적으로 움직여보자, 거기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로 현재까지 여러 활동들을 이어오고 있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에 관한 다양한 실천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는데 어떤 것이 있는가?
녹산공단조직화사업에 결합한지 2년 됐고. 그 다음에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활동이라면 책자 만든 것. 책 출판 이후에 지역에서 계속 선전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방안들도 고민하고 있고… 거제통영도 그 일환으로 작년부터 고민하다가 올해 8월에 집중 선전전을 2달 동안 했고. 그 이후에 두 번씩해오고 있다.

통영, 거제를 선정한 이유는? 그곳의 상황은 어떠한가?
거기는 조선소 하청구조이다. 블록 만들고 뭐하고. 거제통영은 노동단체도 하나도 없다. 민주노총 거제시협 말고는 노동단체도 없고. 정규직이 20%, 비정규직이 80%이다. 나머지 구조도 물량 따라 이동하는 비정규직 구조이다. 거제통영 상정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불안정구조가 조선산업 쪽으로 해서 확장되고 있는데 거기는 아무런 기반도 단위도 없고 해서 사업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요즘에 어디 가도 지자체라든지 어디 지원받아서 운영하는 방식이 많은데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제통영은 노동자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자생성을 가지는 조직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무려 8개 언어로 출판한 이주노동자 책자를 만들기 위해 굉장히 고생한 것으로 안다.
2년 전에 안식년 갖고 나서 가장 집중하고 싶은 활동은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 문제였다. 특히, 우리가 그동안의 활동에서 축적해 왔던 것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아직도 먼 문제이고 해서 첫 출발로 책을 만들자고 작년에 제안을 했다. 책 만드는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번역과 교정의 작업을 계속 반복해야 했다.
처음에 책 만들자고 모임 시작했을 때 “굳이 이렇게 자세하게 담을 필요가 있어? 그냥 ‘오세요.’ 하면 되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동안의 ‘노동조합으로 오세요.’ 같은 조합으로의 사고, 물론 노동조합이란 건 분명한 조직틀이고 굉장히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에게는 굉장히 멀다는 것을 느꼈다. 법에 있는 권리라고 하는 것도 노동자 개인이 그것을 주장하거나 찾을 수 없는 굉장히 먼 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책 만들면서 총 30명 정도가 이 책 만드는데 손을 보탰는데 쌈박하게 잘 만들어진 책보다는 사람들이 힘을 보태는 과정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는 사람들이 손쉽게 받아볼 수 있는 리플렛 형태로 줄여서 배포할 예정이다.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꽤 많지만…94년도 처음으로 산재 상담했던 노동자. 폐암3기 진단받고 찾아왔었고 연탄 공장에서 일하던 분이었다. 처음 그 분 상담 받았을 때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혼자서 공부하고 사람들한테 묻고 배워가면서 했었다. 이분이 1차에서 기각되고 심사청구를 넣으려고 도장을 받으러 그 분 집에 갔는데 내가 도착하기 몇 분전에 돌아가셨다. 그분이 유언으로 남기신 말이 “이삼십년동안 애들 키우느라고 평생 노동하면서 살았는데 나중에 남는 게 병밖에 없고 나는 너무 억울하다. 내가 죽더라도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모임’과 끝까지 소송까지 해서 이 억울함을 꼭 밝혀 달라.” 였다. 안타깝게도 가족들이 돈이 없어서 끝까지 못했다. 부인과 참 많이 울었었다.
또 하나는, 이상관 아버님이랑 투쟁하던 그 과정이 기억에 일일이 남아 있는데 가장 뇌리에 박혀있는 건, 2003년도 말에 이상관 형이 산재 요양 중 자살을 하고 조합장 장례 치르는 과정이 이었다. 노제를 지내는데 아버님은 아들 장례식이니까 좀 떨어져 있었다. 만장이 뒤에 있고 아버지가 제 옆에 앉아 담배를 한 모금 피시면서 한 마디 하시는 말씀이, “두 아들이 살다간 인생보다 내 인생이 더 길다, 은주야” 지금도 그 장면이 사진처럼 있다. 그 말에 아버님이 모든 걸 다 담고 계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평범한 분이셨는데 투쟁하면서 아버님으로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거고, 그리고 이상관 투쟁 안에서 보여줬던 현장동지들, 운동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 이 한 장면에 있는 느낌이었다. 사진을 배우면 이 느낌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진을 배우게 되었다.

대우조선의 근골격계 투쟁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이건 책을 써도 몇 권을 쓸 정도로 그 안에 정말 복잡한… 근골격계 투쟁이 99년도 이상관 투쟁 이후에 다 죽어가던 현장을 살리고 우리가 다시 연대하자는 것으로 해서 ‘전국노동자투쟁연대’가 그런 근골격계 단위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노보연도 근골격계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근골격계 투쟁은 정말 몇 년을 현장에서 조직하고 움직여서 만든 투쟁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IMF 거치고 나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모든 걸 걸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적인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끊임없이 안으로, 밑으로부터 꾸준히 논의하고 조직하는 과정이 근골격계 투쟁이 전국화 될 수 있는 이유였다. 누가 지침 내려서 하는 게 아니고, 현장에 가서 토론하고 이야기 끄집어내고 이야기 들어주고… 이런 과정이, 그런 준비단계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아프다고 했을 때 “나도 아픈데” 라는 노동자들의 자기 목소리가 형성 됐던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다시 그러한 투쟁으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갈수록 정규직조차도 개별로 보면 ‘사는게 뭘까?’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매여서 잔업 특근을 하고 인간으로서 답답한 것들을 누르고 있을 거라고. 그것을 분출시키고 드러낼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은 “뭐뭐 합시다!” 라고 외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과정일 때 가능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삶 자체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파편화돼 있지만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 장기적 전망과 과제로 어떻게 연결시키고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노동안전보건 활동의 핵심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윤보다 노동자의 삶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건강은 소망이나 바람이 아니고 권리라는 것.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건강은 개인의 문제고 개인이 노력해야 되는 것처럼 만들어 가고 있고 건강에 관한 무수한 상품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소비의 구조로 전환되기도 하고. 건강이라는 것이 개인의 문제 개인의 노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과제고 사회적 책임의 문제로 봐야 된다. 노동자의 건강은 내가 왜 이렇게 일해야 되는지 고민해야 하고 요구해야 하고 소망이 아니고 권리다 이런 것들을 확산시키는 것.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계속 구호로 써오다 보니, ‘건강이 권리’라는 의식이 현장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주당 70시간 막 이렇게 일하면서 보약 먹는다는 거야. (웃음)”
사회구성 자체는 노동자의 건강이나 삶이 이윤이라는 것 이런 것을 통해서 다 파괴되고 있는데 그것을 보존하는 과정으로 또 돈을 들여서 약을 사먹고 헬스클럽 가서 몸을 만드는 것으로 전환시켜 가는 그런 구조이다. 그 구조로 열심히 일해서 소비하고, 소비하면서 또 채우려고 하면 또 일해야 하고 쳇바퀴처럼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은 사실, 들여다보면 굉장히 지루하다. 늘 하던 방식으로 움직이고. 그 안에서 ‘나라는 건 뭔가?, 인간이라는 것은 뭔가?’ 그런 사고가 있어야만, 그런 것을 꿰뚫고 보려고 해야만 건강이라는 문제도 접근 가능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일터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끊임없이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같이 논의돼야 방안도 나오고 방법도 나오고 모색도 되고 연대도 되고 할텐데 갈수록 이게 다들 좁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각자의 영역에서 바쁘고들 해서 소통되고 연대하지 못하는 그런 게 많은 것 같다. 그런 틀과 한계를 뛰어넘어 소통과 연대를 시작해야 전망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일터를 보시는 분들도 자기 가족, 자기 노조, 자기 지역 여기에만 갇히는 게 아니고 열고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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