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ㅣ11월ㅣ문화읽기] 과거로 간 의사들이 명의가 되는 법

일터기사

과거로 간 의사들이 명의가 되는 법

후원회원 문창호

닥터 진, 골든타임, 신의, 제3병원, 그리고 마의까지 올해도 의사들은 바쁘다. 게다가 타임슬립(예기치 못한 시간여행)까지 연기해야 했는데, 신의에서 강남 성형의사 김희선은 고려 말로 끌려가 하늘의원이 되고, 닥터 진에서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 진혁은 1860년대 조선으로 떨어져 백성과 왕가를 구한다. 그런데 김희선도 그렇고, 진혁도 그렇고 과거로만 가면 돈 좋아하고 제 잘난 멋에 살던 의사가 명의로 거듭난다. 돈은 필요 없고, 열성은 기본이요, 완치율 100%는 덤인 이상적인 의사되기가 쉽지 않은데, 시간여행은 때 묻은 의사를 위한 세탁기라도 된단 말인가?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진혁은 여친 미나의 달동네 의료봉사를 “너 그 일, 언제까지 할 건데? 학부 때, 인턴 때 주말마다 실컷 봉사했으면 할 만큼 했잖아.”라고 불평하는 차가운 의사였다. 또 달동네 아저씨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와 미나가 부탁하는데도, “의사라고 해서 세상 사람 다 구할 수 없어. 어차피 불가능할 것 뻔히 알면서 맘 편하자고 수술 하니? 수술 한 번 하는 데 드는 돈과 시간이 얼만지 알아? 그거라면 차라리 살릴 수 있는 환자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는 게 나아.”라고 외면하는 계산에도 빠른 의사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하얀 정글 사이
의사가 되면 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다음과 같은 서약이 있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그러나 의료계의 현실을 까발린 『식코』, 『하얀정글』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서약은 뒷전이다. 아무리 병이 중해도 돈이 없으면 병원 문지방도 못 넘는 건 당연지사! 돈이 있어도 과잉진료로 인한 부적절한 치료와 과한 의료비 부담에 몸이 다시 병들 지경이다. 뭐, 다큐멘터리가 아니어도 누구나 알고 겪고 있는 실태이다.
진혁의 처음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공감하기 이전에, 투입과 산출을 먼저 계산한다. 환자에게 들어가는 돈과 시간, 그래서 나오는 성공가능성과 보수. 이 계산에서 손해가 나면, 그 환자는 “살릴 수 있는 환자”가 아니다. 이런 진혁이 조선시대에서는 의인으로 거듭난다. 환자가 어떠한 사람이든 아프고 병이 있으면 우선은 고치려고 보는, “모두”에게 공평하고 최선을 다하는 의술을 베푼다. 마의에서 곧 조승우가 선보일 의술처럼.
진혁이 의로운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타임슬립 중에 부족한 인성은 현대에 다 두고 왔나? 상상력을 돋운 사실은 진혁이 살아가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였다. 조선에서 진혁은 현대 의료기기의 부재라는 난관에 부딪치지만,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당대의 재료들을 모아 비슷하게 만들어내 극복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구들은 원래 모습과 비교하면 조잡하지만, 한 가지 장점은 있다. 바로 병원이 소유한 값비싼 장비가 아닌, 공공의 재산이라는 점이다. 요즘 중대형병원들이 경쟁적으로 고가의 의료장비를 들여놓고는 본전 찾기 위해, MRI부터 찍자는 식의 부담스러운 의료행위들을 환자에게도 소속 의사에게도 강요하는데, 진혁은 이런 압박을 당연히 받지 않는다. 또 진혁은 더 이상 종합병원에 고용된 의사 신분도 아니다. 하나하나의 의료행위에 가격이 매겨져 있고, 접수하고 계산 치루는 원무과를 거치지 않은 환자는 진찰하지 않는 대형병원과 달리, 진혁과 환자 사이에 놓인 문은 환자의 믿음과 진혁의 양심뿐이다. 물론, 진혁과 환자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봉사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진혁은 여러 가지로 보답을 받는다. 다만, 돈의 오고 감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즉, 진혁이 명의가 된 비법은 상품거래의 구속에서 벗어나 의술을 양심껏 마음껏 발휘했기 때문인 것이다.

의술과 상술의 불행한 결혼
타임슬립은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대한민국에서 진혁이 일하는 종합병원이 상업화된 의업, 상품화된 의술을 상징한다면, 조선으로 떨어진 진혁이 환자를 돌보는 오두막은 탈상업화, 탈상품화된 의술이 자기 본질을 회복하는 장소이다. 사고실험의 결과는, 흰 가운을 걸친 진혁보다는 허름한 천을 걸쳤지만 진정 의사다운 진혁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이듯이, 의술과 상술이 하루 빨리 헤어지는 게 낫다는 것이다. 사실 의술이 사람을 차별하는 순간 그것은 치부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저급해진다는 진실을 많은 드라마에서 주인공과 대척점에 선 인물들의 추락을 통해 보여줘 왔다. 요즘 방영하는 마의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침으로 사람 죽이며 영감 자리에 오른 손창민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해 보인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진실이 통하지 않는다. 돈 잘 버는 게 의사의 최고 덕목처럼 통한다. 그러나 상술에 빠진 의술을, 사람의 건강과 생명에 값을 매기는 행위를 의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는 천부인권이다. 그러나 의료가 시장에서 거래되고, 의술이 돈벌이 수단이 된 현대사회에서 건강권은 소득수준에 따른 불평등한 권리로 전락해 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오히려 의료시장화에 몰두해왔다. 영리병원을 허용하고, 민간의료보험 확대를 자극해왔다.

저번의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은 자국의 NHS(국가의료시스템)를 세계에 자랑했다. 신자유주의의 고향인 영국이지만, 의료만큼은 국가가 책임지고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제공한다. 반시장적인 NHS 때문에 영국을 선진국이 아니라는 사람은 없다. 한 명만 암에 걸려도 온 가족이 빚더미에 주저 않고, 아파도 병원비가 없어 집에서 시름시름 앓을 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되는 한국을 좋다고 뽐내는 사람들도 제 정신은 아니다. 영국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건, 개개인의 건강을 사회가 보장해주고, 의술은 모두의 건강을 위해 존재하고, 평등하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건전한 상식이다. 이제는 드라마로만 상식을 증명할 게 아니라, 무상의료 앞당겨 우리도 상식적으로다가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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