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ㅣ11월ㅣ특집 2] 독일의 ‘노동시간계좌제’, 한국에서 가능한가?

일터기사

[특집2] 독일의 ‘노동시간계좌제’, 한국에서 가능한가?

한노보연 기획위원 이진우

1.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 유연화 쟁점
노동시간 단축 문제는 불황 시기의 일자리 나누기 성격이 강했고, 심야노동 철폐의 모범인 두원정공의 사례도 2006년부터 2009년 사이 발생한 생산량 감소와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에서 출발한 측면이 크다. 한국의 40시간 법정노동시간단축은 선진국 기준을 수용한 것과 동시에 정세적 의미와 노동운동도 큰 역할을 했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 나누기 성격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장시간 노동 규제는 노동시간 유연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정부는 탄력적근로시간제 일정기간 평균근로시간이 주40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특정 주에 주40시간 이상 초과근로 가능
등을 통해 “불필요한 연장근로의 축소 및 실질 근로시간의 단축을 통하여 근로자의 일과 삶의 조화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는 잔업 특근 무상화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2.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저축휴가제’ 도입
고용노동부는 2012년 7월부터 ‘근로시간 저축휴가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근로시간 저축휴가제란 ‘연장, 야간, 휴일근로 등 초과근로나 사용하지 않은 연차휴가를 근로시간으로 환산해 저축한 뒤에 근로자가 필요할 때에 휴가로 사용하거나 저축한 근로시간이 없어도 미리 휴가를 사용하고 나중에 초과근로로 보충할 수 있는 제도’로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 중 하나이다.
일부 노동운동 진영과 학자는 한국의 장시간노동체제 원인을 초과노동에 대한 노사정의 담합구조에서 찾고 있으며,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단축하기만 하면 일자리 만들기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실노동시간단축을 위해 필요한 제도 중 하나로 정부가 입법예고한 ‘근로시간 저축휴가제’를 꼽고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약간의 소득감소만 감수하면 그 대가로 고용안정, 소득안정, 근로자의 근로시간선택권 등을 보전할 수 있다”며, 이와 유사한 형태로 노동시간 유연화 모델인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3. 독일 기업의 ‘근로시간계좌제‘란 무엇인가?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란 ‘근로시간 집계의 수단으로 유연적인 근로시간제 운영을 가능하도록 하는 기본적인 관리요소’로서 실무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개념이다. 따라서 기업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으나, 실근로시간과 소정근로시간(또는 협약근로시간)의 차이를 적립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수행된 실근로시간은 계좌에 시간단위로 계산되는데, 실근로시간이 소정근로시간보다 많은 경우에 그 차이만큼 근로시간계좌의 적립시간을 가산하고 실근로시간이 소정근로시간보다 적은 경우에 그 차이만큼 적립시간을 차감하는 방식이다.
독일의 법률에서는 근로시간계좌제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근로시간법이 근로시간계좌제의 제약 조건과 근로시간의 유연화에 관한 법적 근거로 존재한다. 또한 독일 특유의 강력한 사업장평의회가 사업장조직법의 규정에 따라 매일 근로시간의 시작과 종결, 휴식, 그리고 개별 주에 근로시간을 배열하는 것과 관련하여 공동결정권을 행사한다.
2007년 현재, 독일 전체 노동자들의 약 47%가 근로시간계좌제의 적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기업 규모별로는 250인 이상인 기업 노동자의 57.1%, 249인 이하에서는 42.3%가 근로시간계좌제를 적용받고 있다.

4. ‘근로시간계좌제’의 문제점
한 기업(독일 바이엘 사)의 ‘근로시간계좌제‘ 사례를 살펴보자. 이 기업의 1일 실근로시간은 5.5시간에서 10시간까지 가능하고, 일일 소정근로시간을 초과하는 근로시간은 잉여근로시간, 미달하는 근로시간은 부족근로시간으로 계산, 분기별로 정산하게 된다. 노동자는 잉여근로시간 분만큼의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회사가 한가한 시기에 보상휴가로 이를 대체하여 지급받게 된다. 정산을 한 뒤에 16시간을 초과하는 부족근로시간은 임금에서 해당분을 삭감하게 되지만, 16시간을 초과하는 잉여근로시간은 추가적인 금전적 보상 없이 자동 소멸되어 노동자에게 불리하다.
노동시간은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대와 회사가 요구하는 의무적 근로시간대로 나누어져 있다. 선택적 근로시간대와 의무적 근로시간대 사이에 ‘가능 근로시간대’가 9시간으로 잡혀져 있고, 이 시간대에는 회사 사정에 따라 회사가 노동자에게 노동을 강요할 수 있다. 바이엘 사에서 회사 측의 근로시간 변경 지시 혹은 요구의 기한은 4일로 근로시간 변경 시점에서 4일 이상의 기간 이전에 회사 측에서 근로시간 변경 및 조정을 요구할 경우에 이 노동은 연장근로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근로시간계좌제‘를 노동자에게 ’선 휴가, 후 노동‘이라는 선택지를 주거나 노동시간을 ’합리적‘으로 노사 합의하에 조정할 수 있는 제도처럼 소개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본이 원하는 시기나 시간에 마음대로 노동자의 시간을 이용할 수 있고, 노동력이 덜 필요할 때는 임금 대신 휴가를 보낼 수 있는 제도인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는 ‘노사상생’을 위한 방안이 아니라 독일의 강력한 노조마저도 자본의 공세에 밀려 시행 중인 ’후퇴의 타협점‘인 것이다.

5.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를 표방한 한국 ‘근로시간 저축휴가제’가 불가능한 이유
이런 ‘근로시간계좌제’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제도이다. 독일에서 기업들이 가능하면 정리해고는 배제하고, 근로시간 유연화, 교육훈련 강화, 직무순환 등의 유연화 전략을 추구하게 된 원인은 해고를 엄격하게 제약하는 독일의 법적인 규정(해고제한법, 노동자대표조직인 사업장평의회), 독일의 노사관계 당사자인 노동조합 및 사용자가 맺고 있는 협력적인 균형 관계,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노동시간 단축 등의 배경이 있다.
이러한 독일의 배경은 한국의 현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해고를 엄격히 규제하는 법이 존재하기는커녕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는 법이 버젓이 존재하고, 노조와 사용자의 권력 균형도 사측에 한참 치우쳐 있으며, 노조 조직률도 고작 10% 정도이다. 또한 주당 12시간으로 제한된 연장근로규정마저도 유명무실한 상황에서, 7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노동시간은 부동의 세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근로시간계좌제’ 도입이 일부 대기업에서 실노동시간단축 효과를 볼 가능성도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기존에 보장된 연차휴가조차 사용자의 동의 없이 사용하기 어렵다. 따라서 실노동시간의 단축은 실패로 남고, 노동자의 일상생활만 사측의 물량 일정에 따라 불규칙해질 우려가 높다. 또한, 단기(1년 이내)와 장기(1년 이상)로 구분되는 시간계좌의 적용방안과 적립노동시간의 상한선을 ‘사업장 여건’에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자의 대표성이 약한 중소기업의 경우 사실상 정산기간 내 초과근로시간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무급처리되는 사태가 무더기로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6. 정부와 자본이 ‘근로시간 저축휴가제’ 등 노동시간 유연화를 도입하려는 이유
정부와 자본은 임금감소를 통한 일자리 나누기(즉 임금 나누기)를 강조하고 있고, 이를 노동비용은 고정한 채, 노동시간 유연화, 임금유연화를 통해 시행하려 하고 있다. 노동의 몫을 줄여 자본의 생산감소와 그에 따른 이윤감소를 보충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진영에서도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방안을 모색 중이다. 하지만 1998년 위기 이후 지금까지 제조업에서의 노동시간단축 효과는 일자리 증가가 아니라 저비용 하청의 증가로 나타났고, 더욱 유연화된 노동조건은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졌다. 노동강도 강화는 노동생산성 향상(연 8% 성장)으로 연결되었지만, 자본의 기계설비 증가는 이에 미치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골병에 시름거리고 있다.
현대차 노동자들은 지난 2010년 1원 임금을 받아 약 2.2원의 이익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자본이 이런 초과이윤을 가져가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정부와 자본이 제시하는 노동시간 유연화 방안을 받는 것은 현실적이거나 합리적인 윈-윈 대책이 아니다. 자본이 가져가는 초과이윤을 고정자본에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노동시간단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부와 자본이 ‘근로시간 저축휴가제’ 등 근로시간 유연화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노사상생이 결코 아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필두로 다른 옵션 제도들을 만들고, 노동자의 시간을 좌지우지 하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지금의 권력 관계에서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노동자 간의 노동시간 개별화, 임금의 개별화, 임금의 신축화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고, 고용형태, 노동시간, 임금의 신축화 3단계가 완성되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가장 필요한 노동자 단결과 연대를 노동시간 유연화로 개별화 하려는 것이다.

7. 노동시간단축을 위한 노동진영의 대안
노동시간단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시간유연화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 민중을 위한 단축이 아니다. 우리의 요구는 자본의 요구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집단적 요구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단결에 기초한 노동시간 단축 요구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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