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4월 문화읽기] 노동시간 단축이 곧 혁명!!! [8시간 vs 6시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을 읽고

일터기사

노동시간 단축이 곧 혁명!!!
[8시간 vs 6시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을 읽고

한노보연 소장 김 정 수

몇 년 전 ‘한국 노동운동사’ 세미나에 참가했던 적이 있다. 그 무렵 읽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경성에서 노동운동을 펼친 지하 혁명조직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을 복원한 역사 소설 [경성 트로이카, 안재성]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파업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혁명가들과 노동자들, 당시 그들이 내세운 요구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 실시!!!”
다른 요구들은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것이지만,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은 바로 지금 한국 노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 당시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이 무척 ‘선진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무려 7~8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똑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는 건 여전히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노동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하며 보내고 있다는 것!!!
IMF와 더불어 마감한 고성장 시대, 불황과 호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요즘. 실업 대책은 늘 정치권의 핫이슈이다. 따라서 대세는 ‘일자리 창출’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럴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학창시절 사회(혹은 역사) 교과서의 영향이 매우 큰 듯하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장기불황-공황-1930년대 세계 대공황-대규모 실업-루즈벨트의 뉴딜정책-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라는 도식이 하나의 진리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따져보면 당시 대규모 실업에 대한 대책은,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로 대표되는 루즈벨트의 뉴딜정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제출한 ‘일자리 창출’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당시 일부이긴 하지만 사업주, 노동계, 정치권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에 대한 공격용으로 마련된 ‘수사적, 이념적, 정책적 대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이 책 [8시간 vs 6시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을 읽고서야 알게 됐으니 말이다.
세계에서 지금까지 ‘콘플레이크’라는 대표상품으로 유명한 미국 기업 <켈로그>는, 대공황 초입이던 1930년 12월 1일, 시리얼 공장 근무시간을 기존의 8시간 3교대제에서 6시간 4교대제로 변경했다. 회사는 임금 총액 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렸고, 공장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됐다. 당시 6시간제 시행과 동시에 시간당 임금이 12.5% 상승하고, 1년 뒤에 다시 12.5% 올라 노동자 각자가 받는 소득은 조금밖에 줄지 않았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시기에 공황(혹은 불황) 극복의 대책으로 제기됐지만, 단지 ‘실업대책’의 의미만 담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켈로그>에서 6시간 노동제를 도입․정착시킨 장본인은 ‘해방적 자본주의’ 당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도했던 일부 자본가들의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만든 용어로, “자본가들은 (경영상의 건전한 의사 결정을 통해) 노동시간을 줄이기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노동자들은 늘어난 여가를 인상된 임금에 필적하는 이득으로 여겨서 (…) 여가를 더 갖기로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써 (…) 삶의 중심이 ‘불가피함과 노동’에서 ‘자유로움과 여가’로 옮겨가리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그 이론적 바탕에 대한 설명을 추가함으로써 이러한 견해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튀어나온 이론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를 신봉한 사장 루이스 브라운과 켈로그의 소유주 윌리엄 케이스(W.K.)켈로그였다. 켈로그에서 진행된 ‘6시간 노동제’ 실험은 비록 ‘선진적 자본가’가 주도한 것이지만, 초기 자본주의 시절 하루 16~18시간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하던 노동자들이 제기한 ‘노동시간 단축’과 맥이 닿아 있다.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실시를 <미국 노동 총연맹, AFL>의 위원장이 열렬히 지지하고, 미국 노동계가 주당 30시간 노동제를 법안으로 제시한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주는 사례이다. 켈로그 노동자 대다수는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늘어난 ‘자유 시간’을 즐겼다. 그들은 늘어난 ‘자유 시간’ 동안 “전통적인 가족과 공동체 활동”을 즐겼고, 허드렛일이 아닌 “가정의 의무들”(예를 들어, 바느질, 뜨개질, 병조림 만들기, 텃밭 가꾸기, 아이들과 지내기, 이웃돕기 등)에서 “자유”를 찾거나 집을 벗어나 할 수 있는 여가 활동(스포츠, 취미 생활, 라디오, 영화, 여행, 친구 등)에서 “자유”를 찾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에게 단순히 ‘자유 시간’의 증가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여가의 증가는 곧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의 증가를 의미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한 통제 권한을 자본가에게 넘겨왔다면, 노동시간 단축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의 일부를 되찾아 오는 과정이었다. 6시간 노동제를 지지한 노동자들은 “일은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는 오래된 견해를 고수하면서, 삶의 중심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기에 여가가 일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하루 8시간 노동에 비해 하루 6시간 노동이, 노동 그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노동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들은 “일이 하루 중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게 되면, 일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갈 수 있다”고 진술한다. 즉, “일이 줄어들고 제자리를 찾으면, 사람들은 흥미를 갖고, 심지어는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줄어들자 대통령령으로 일시적으로 8시간제로 복귀한 것을 제외하면 켈로그 공장의 대다수 노동자는 6시간제에 만족했고,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6시간제 노동은 1940년대를 지나며 회사의 경영진이 교체되고, 이들이 8시간 노동제로 경영방침을 바꾸자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전부터 8시간 노동제를 지지해 온 장기근속 남성 노동자들, 그들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해 온 노동조합이 회사의 경영방침에 동조하며 6시간 노동제는 서서히 후퇴를 거듭한다. 결국 한 부서씩 8시간제로 근무형태가 변경되기 시작해, 1985년 공장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겠다는 회사의 압력으로 켈로그에서 6시간제는 막을 내렸다.
당시 8시간 노동제로 경영방침을 바꾼 회사 경영진의 입장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1930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에 지지를 보낸 후버 행정부의 뒤를 이은 루즈벨트 정부는 “풀타임”으로 “일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고 (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국가 진보의 기초라고 여겼다. 이와 함께 1950년 이후 경영학계에서는 일에 대해 “수단으로서의 일에서 그 자체가 목적인 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자본가들은 이를 적극 수용했다. 그들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노동자가 노동에서 해방될수록 자신들의 통제력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다. 바뀐 회사의 경영방침에 동조하며 6시간 노동제를 공격한 장기근속 남성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내세운 근거는 주로 “필요성/불가피성”(“6시간으로는 생활비를 감당할 여력이 안 돼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살기에 충분한 돈을 못 벌고 있었어요.” 등)이었다. 이들은 일에서 벗어난 ‘자유 시간’을 “잃어버린”, “버려지는”, “어리석은” 시간으로 표현하며 여가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고, 일에서 벗어난 시간의 활동을 여성화됐다고 표현했다. (“(6시간제는) 결혼한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어요.” “여자들은 풀타임으로 일할 능력이 안돼요.” 등)
IMF 이후 일상화된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에 직면해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요 대안으로 주장해왔다. 몇 년 전부터는 심야 노동 철폐가 노동계의 핵심 화두의 하나로 떠올랐고 ‘주간연속 2교대제’가 주요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형국이다. 작년에는 이례적으로 노동부가 적극 주도해 장시간 노동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 상황이다. 바야흐로 ‘노동시간’에 대한 논의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직면한 우리에게 막상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비전이 있는지 궁금한 상황이다.
한국 노동자가 OECD 국가 중 최장시간 노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과도 같다. 한국 노동자가 그만큼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역으로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매우 큰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버트란트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역설한 것처럼 하루 4시간 노동이 현실로 가능하다는 비전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그래야 켈로그 노동자들이 경험한 6시간 노동제를 현실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 혹자는 기업 경쟁력을 우려한다. 기업경쟁력이라고? X같은 소리다. 지금처럼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해도 망하는 기업은 망하고 떠날 놈들은 다 떠난다. 지금껏 그래온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감히 말하자면, 하루 6시간만 노동해도 망하지 않는 기업, 떠날 수 없는 기업이 훨씬 더 많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벌 대기업들 역시 대부분 멀쩡할 것이고 못 떠난다. <켈로그>의 실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 상상력, 소심함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보다 공세적으로 우리의 입장과 비전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만약, 하루 4시간 노동이라는 비전을 갖는다면, 노동시간 단축이 곧 혁명이 아닐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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