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9월| 이러쿵저러쿵] 산재노협을 만나고 현재까지

일터기사

산재노협을 만나고 현재까지

산재노협 대표 박영일

89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서 신나게 놀고 있던 중 덩치가 만만치 않은 중학교 형들의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웃옷을 훌러덩 벗고 타이즈 차림으로 운동장을 뛰고 있던 레슬링부 형님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체력장이 있었는데 레슬링부 형들이 체력장을 구경하고 있었나보다. 한 선배가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며 ‘레슬링을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스카웃이 되어 레슬링을 시작했다.

고등학교까지의 운동부 생활을 했다. 그러다 고 3 당시 예상치 않았던(?) 사춘기와 전문계고를 다니며 기술을 배우는 것에 취미를 느끼게 되었다. 또 한켠으로는 이유 없는 체벌에 운동을 관두게 되었다. 그리고 난 자격증을 땄다.

현장에 나갔다. 1998년 4월 17일, 탱크를 만드는 인천의 방위산업체에서 250톤 프레스에 손을 눌리는 산재를 당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인천의 병원에서는 왼손의 손목을 절단하자고 했고, 부모님는 그럴 수 없다고 항의하셨다. 결국 광명의 한 병원에 왔고 손목 절단은 막을 수 있었다. 3개 손가락을 절단하고 지금은 그나마 움직이는 엄지 하나와 무언가를 잡기위해 만들어진 강직된 손가락 하나가 있다.

병원에 누워 멘붕으로 지냈다. 현재 소속되어 있는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에서 그 당시에도 병원 방문을 사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산재노협의 도움을 받아 산재처리와 피해를 볼 뻔한 부분들을 잘 처리 할 수있었다. 98년부터 현재까지 산재노협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지금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부터 나에게 산재노협은 산재 피해자들에게 무료상담과 치료받을 권리 등을 알려주는 휼륭한 조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해가 거듭 될수록 왠지 모르는 씁슬함이 느껴진다. 어느덧 서른 일곱이라는 나이가 되고 보니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아진다. 삶을 어찌 살아가야하나,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어찌 될까? 잘 되겠지? ^^;;

“환장하겠다! 마음이 착잡하네요^^
산재노협도 나도, 처음의 마음을 다시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넋두리를 해봅니다.
산재노협 홧팅!! 한노보연 화이팅!! 모두 모두 화이링!! (급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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