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12월|기획]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

일터기사

여덟 번째 이야기
가리어진 나의 길, 그래도 내 길 간다.
–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

한노보연 선전위원 송홍석

전화 받는 그의 목소리는 막 자다가 일어났는지 나지막하게 잠겨 있었고, 피곤함이 여과 없이 줄을 타고 전해져왔다. 박카스가 떠올랐다. 젠장, ‘일터’ 잡지에서 후려 친 박카스를 들고 흥분된 마음으로 찾아간다. 그 흔한 간판도 없는 그의 사무실은 몇 장의 영화 포스터만이 그가 어떤 업계에 있는지 말해주었고, 상상속의 영화제작사와는 달리 남루해보였고 건물 밖 추운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는 형 덕분에 매우 싼 임대료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경력 4년차의 신인 영화 프로듀서이다. 2시간 남짓 짧지만 강렬했고 따뜻했던 인터뷰. 그의 소설 같은 이야기, 영화 같은 삶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영화산업이 처한 현실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인생 서막
세탁소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재였던 규범과 계(戒)의 세계를 줄곧 살아온 형과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마냥 생긴 대로, 욕망하는 대로 말썽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공부와는 담쌓고 지내던 그가 대형 사고를 치던 어느 날, 그런 동생의 소행이 항시 못마땅하여 그날도 대판 싸웠던 형이 무릎 꿇고 눈물로 사과하던 그 날, 영화처럼 동생도 따라 울며 안하던 공부를 갑자기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던지 형을 따라서 울산의 명문고에 입학하였고, 게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 뽑는다는 기숙사에 동생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제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솟아오르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서울의 상위권 대학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특이하게 같은 인문대 안에 연극영화과가 있었다. 자연스레 영화를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 서민의 아들로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운동판’에 몸을 담갔고,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혼자 골방에서 소설 쓰는 것은 내가 즐거워하지 않는구나. 단편영화 찍으면서 되게 재미있고 이 일 자체가 나랑 맞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군대를 나오자마자 휴학을 했어요.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제 환경이란 게 세탁소 집 아들인데, 형은 사법시험 공부하고 있고, 서울에 두 아들 겨우겨우 보내놓았는데, 학교졸업하고 영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상 코스를 밟으면 웬만한 대기업엔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길이 보이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결정을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지금 시작해야겠다! 생각하고 학교에 휴학계를 냈죠.”

영화 인생 1막 1장
그렇게 24살 청년은 보이지 않는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연출(감독)의 길과 제작(프로듀서, PD)의 길 중 무얼 할까 고민했는데, 제작을 선택했던 건 ‘생계문제’가 제일 컸다고 한다.

“당시 감독하려면 단편 연출도 많이 해야 하고 돈이 많이 들거든요. 그때는 필름시절이라, 천만 원 이천만원 깨지는 건 우스운 일이었어요. 아르바이트 1년해서 영화 찍는 애들이 되게 많았어요. 단편영화 하나 찍는데 사람이야 주위에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지만, 장비 빌리고 자본이 워낙 많이 들어가다 보니까 단편영화 찍는데 못해도 천만 원 깨진다고 보시면 돼요. 그 시절에. 나는 그걸 하면서 못 버티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둘째로는 피디나 제작파트쪽은 일을 잘하는 친구면 꾸준히 일이 있어요. 연출 파트 쪽은 사람이 많은 반면, 이쪽 제작 쪽은 사람이 적은 편이어서 내가 생계를 유지하면서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건 피디인거 같다. 또 좋은 감독은 많은데 좋은 피디는 없지 않나.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해서 그때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지금 생각하면 되게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생각해도 저는 PD가 훨씬 재미있거든요.”

독자들의 이해를 돕자면 제작자가 되기까지 과정은 이렇다. 제작부 막내로 시작해, 제작부장, 제작실장, 라인프로듀서를 거쳐 비로소 흔히 제작자라 불리는 총괄프로듀서가 된다. 총괄프로듀서는 영화의 기획과 제작 전반을 책임지는 주체이고, 라인프로듀서는 총괄프로듀서의 지휘를 받아 개별 영화 현장의 진행을 담당한다. 제작부 막내에서 시작해서 프로듀서가 되기까지는 통상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도 누구나처럼 2001년 제작부 ‘막내’로 시작했다. ‘막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티는 안 나지만 없어서는 안 될 갖은 허드렛일을 도맡아한다. 각종 심부름들, 영화에 필요한 비품 관리, 섭외, 식사 진행, 현장 정리 등이 ‘막내’가 해야 할 일이다.
“아침 새벽에 가서 식당 잡아놓고 사람들 정리하고 담배꽁초 버리면 버리지 말라 말하고, 줍고, 촬영 끝나면 현장 완벽하게 청소해놓고, 소품 빌려준 사람들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뭐 그런 것들이 막내가 하는 일들이에요. 장소 헌팅하는 일도 있어요. 감독이 “지하 주차장이 녹색바닥이 아니라 시멘트바닥이면 좋겠어. 기둥도 두세 개 있었으면 좋겠어” 하면 겁나게 찾아다녀요. 장소를 세 군데 정도 찾아서 감독한테 브리핑한 후 감독이 OK! 이거 마음에 들어 그러면 섭외하고, 섭외 안 되면 무릎 꿇기도 하고요. 현장에서 사람이나 차 막는 일도 일인데. 감독은 꼭 차 막을 수 없는 곳에서 촬영을 해요. Ready Go! 하기가 어려운데 차가 들어오면 막 욕해요. “야! X발! 뭐 하는 거야, 제작부!”. 저는 그런 걸 잘 했던 것 같아요. 무대포니까. 그러다 발등이 차바퀴에 깔리기도 했어요. 해서 내 발 밟았으니까 서라고 했죠.”

그런데 얼마 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PD가 되고 나서 첫 작품할 때였는데, 제주 월드컵경기장 앞 8차선 도로를 완전히 막는 일을 했던, 형동생하며 친하게 지냈던 제작부 막내가 10년 전 자신처럼 똑같이 차에 발등을 밟혀 골절상을 당한 것. ‘10년 전과 상황이 하나도 안 바뀌었구나’ 생각하며 그 아이한테 너무 미안했다고 한다.

그의 ‘막내’시절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2001년 제작부 막내로 첫 작품할 때 8개월 동안 일하면서 이삼백만 원 받았어요. 6개월 일하고 백만 원 받기도 했었고요. 6개월 하다가 엎어져버리면 한 푼도 못 받았던 적도 한 세 번 정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게 계속되면 일 년 수입은 얼마 안 되는 거예요. 영화 일만 가지고는 보통 1년에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원 이상 받기 힘들어요.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생활비가 안 되니까 뮤직비디오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어요. 영화는 적게 주는데, 뮤직비디오는 한편 한 달하면 일이백만 원은 받았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아는 형한테 뮤직비디오 부탁해서 보름이고 밤새고 했었죠. 형이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형을 공부시키면서 생활을 유지해야 하다 보니까 일을 끊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한 작품 끝나면 다른 작품 있는지 돌아다녀보고……. 하여튼 피디 되기 전까지 계속 그런 생활을 했어요. 제작부 실장하고 있었을 때도 한 4-5개월 일했는데 촬영 들어가기 전에 투자사에서 손을 떼버린 거예요.”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돈 없으면 영화 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스텝들 면접볼 때도 가장 먼저 묻는 게 “너희 집 뭐하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돈 없으면 하지 말고 다른 거 찾아봐” 라고 말한다. 수입이 불안정한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이삿짐 나르는 형들도 있었고, 최근 영화감독은 연출한 다음에도 대리기사도 하고 그랬어요. 작품 기획 제작 전에는 돈을 벌기 어려우니까. 대부분의 경우엔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는 게 고정적인 직업을 가져버리면 두 개를 병행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일용직 일을 제일 많이 하죠.”
“촬영하다보면 48시간 밤새는 것은 예사였어요. 그러면 현장은 죽어있고. 거의 다 쓰러져 있고요. 요즘엔 그렇게 까지는 안하는데, 그래도 24시간 촬영은 꽤 있어요. 말도 안 되는 거죠. 가령 세트장을 7일 후면 비워줘야 하는데 어떤 배우는 CF촬영한다고 3일을 갔다 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7일 촬영 일정을 4일에 다 찍어야 되는 그런 상황이 생기는 거죠. 그런 것을 최대한 없애고자 영화노조도 생기고 시간제한도 두고 해서 지금은 많이 변한 편인데, 그 시절엔(제작부막내) 늘 그렇게 일해 왔던 것 같고, 일 끝나면 다음 일 찾아서 하려 했었고 노가다도 하고 다니고, 생계를 꾸려야하니까.”
그는 지금 어금니 두 개가 없다. 제작부 막내 시절에 한 개를 잃었고, 제작 실장때 또 한 개를 잃었다. 일 욕심도 있었지만, 매일 계속되는 빡빡한 촬영 일정에 썩은 이빨의 치료시기를 놓친 것이다. “통증도 엄청나고 입이 이렇게 부어오르는데 병원을 못 간 거예요. 영화하는 스텝들이 그런 게 되게 힘들어요. 일하는 대가를 제대로 못 받고 대신에 꿈으로 저당 잡히다보니까. 내가 미래를 위해서는 좀 참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고요”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제작부장을 거쳐 제작실장이 되어서도 계속된다.
“제작실장도 실무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일을 하면서도 수입은 굉장히 불안정하죠. 월급이라도 매번 들어오면 좋은데 일이 끊길 수도 있고, 작품이 엎어질 수도 있고 해서 불안함이 제일 큰 거죠. 미래에 대한 불안함. 억울하기도 하고요.”
“저희 영화사에 제작실장하는 7년 아래 동생이 있는데 애가 셋이에요. 당시엔 저도 작은 작품을 하고 있어서 얼마 못 받을 때였는데(1년 넘게 걸린 작업인데, PD 몫으로 이천오백만원 받았어요), 제가 얼마 못 받으면 밑에 있는 애들도 얼마 못 받아요. 그 친구랑 술을 먹는데 그 친구 아내가 셋째 낳고 나서 산후조리원에 한번이라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거예요. 제작실장 급여가 뻔 하죠. 월급으로 했을 때 150~200만원 안되게 받았는데, 애 둘 키우고 셋째 산후조리원까지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술김에 “야 그거 형이 내줄게”했는데, 저도 빚 갚을 거 갚고 나니까 350만원인가 남더라고요. 얼마 보낼까 밤새 고민했어요. 250 ?, 260 ?, 270 ? 그렇게 고민하다가 300 보냈는데, 그날 밤에 제수씨한테 고맙다고 울면서 전화가 왔어요. 그때 ‘250 안보내기를 잘했어’라고 생각했죠. 하하하”

2001년 막내로 시작해서 2008년 PD가 되었다
그렇게 이빨 두 개 잃어가며, 차바퀴에 밟혀가며, 박봉에 알바로 버텨가며, 날 밤 새가며 그렇게 영화노동자로 살며 일하며 드디어 PD가 되었는데, 그렇게 앞만 보고 내달려왔는데, 불안한 삶은 떠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니까 영화 끝나면 교보문고에 가서 몇 날이고 책을 거기서 읽고 좋아하는 책만 사가거든요. 하루는 폐점 시간이 다 되어서 나가려고 하는데 문득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어린나이에 시작해서. 제가 제일 부러웠던 게 친구들 해외 배낭 여행가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시간에 영화를 했었고. 지금까지 진짜 열심히 해왔는데, 서른한 살인 나한테도 선물 하나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형한테 나 여행 좀 갔다 올게, 백만 원만 쓰고 올게 하고 도쿄를 자유여행으로 2주정도 갔다 왔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저한테 들어온 작품 2개가 모두 엎어진 거예요. 여행 때문이 아니라 그때 업계에 불황이 시작된 것이죠. 그 이후로 두 달간 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이때까지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는데 왜 이렇게 어렵고, 내가 왜 영화를 했지 화가 나는 거예요. 그때 영화를 그만둘 뻔했죠. 돈 되는 애니메이션 교육 콘텐츠 사업을 선배랑 3개월 정도 했는데, 이게 스스로도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해서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그런 게 저희들 애환인거죠. 영화 스텝들, 영화노동자들. 첫째로 보장된 미래가 없으니까요.”
단지 영화가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생활은 왜 맨날 이 모양일까? 그는 순수 영화판에서 돈을 보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영화판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영화 노조가 2007년 만들어졌는데, 2006년까지 영화가 잘 되고 하니까 배우들 페이가 많이 올라갔어요. 전체 예산 100%중에 배우들한테 써야할 돈은 20~30%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가령 50%로 확 늘어나 버리는 거예요. 이 돈이 어디로 빠지는가 하면 결국 영화노동자들 임금을 착취하는 결과로 이어지거든요. 저임금이 싫어? 하기 싫으면 말고 이런 식입니다. 또 영화의 질도 떨어뜨리는 거죠. 옥외 세트장을 이천만원 들여서 지어야 되는데, 정말 싸게 해줄 수 있는 업체와 계약하면 영화의 질은 떨어지고 관객들은 줄어들게 되고 이게 연쇄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영화노조가 처우개선,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휴식시간 보장 이런 것들을 요구하면서 영화노동자들 처우가 좋아지려고 했는데, 2008년을 기점으로 다시 영화산업의 불황기가 오니까 그게 다 없어져버렸어요. 영화가 다 엎어지고 망해버리고 그래서 투자가 확 끊겨버리니까, 그때 영화노조 힘이 다 빠져버리고, 그때 조정될 수 있었던 게 다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런데 일부 제작자들, 일부 배우들의 문제는 사실 아주 작은 부분일 수 있고, 훨씬 더 큰 문제는 영화산업에 대자본이 투자되면서 그들 투자사의 이윤논리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투자사에서 가져가는 몫이 되게 커요. 그만한 리스크를 감안하더라도 영화 인력보다는 영화 외적으로 빠지는 부분들이 너무 크다는 거예요. 예전엔 투자사와 제작사가 나눠가는 몫이 6:4정도였어요. 제작사의 몫에 는 배우, 스텝 등 영화 인력도 있고, 세트도 포함돼요. 근데 이게 좀 더 나가서 7:3, 8:2, 9:1까지도 넘어가기도 해요. 대자본을 가진 투자사가 9를 가져가는 거예요. 그 바람에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영세해졌어요. 8:2, 7:3으로 배분이 되면 1년 경작료도 안 되는 돈이 들어오기도 하죠. 게다가 투자사에서 제작지분을 요구하기도 해요. 공동제작 타이틀을 걸어버려요. 6:4, 7:3인 상태에서 공동제작사 지분을 거기서 또 30%를 가져가요. 근데 이 나라의 영화산업이란 게 독과점이잖아요. 투자, 배급, 극장 모두를 쥐고 흔드니까요. 할리우드의 경우 배급과 투자는 분리해야 하거든요. 지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 됐죠”
“감독이나 제작자가 되면 상황이 좀 달라지긴 하는데,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신임감독이 충무로에서 인정받기는 되게 어려워요. 한 작품의 성공과 실패가 그 사람을 판가름해버리니까요. 그 이후론 섭외가 안 들어오는 거죠. 투자사에서 이 감독은 망한 영화한 감독이잖아. 이 감독 빼. 그러나보니까 한 작품하고 사라진 감독이 굉장히 많아요. 한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한 60-70%정도 될 거예요.”

하지만 희망은 역시 사람이다
이런 시스템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제작자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영화의 질도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자본의 논리를 보고 느끼면서 자란 영화인들이 변화의 씨앗이 될 것이다.
“제작실장 할 때였어요. 제작실장이 예산을 집행하고 조정하고 협상하는 사람인데, 당시 조명업체가 돈을 너무 많이 받아가는 거였어요. 세트업체에서는 저한데 수백만 원씩 리베이트를 주려 했고요. 이런 조명업체들, 세트업체들에게 주는 돈들을 다 깎아버렸어요. 그 깎은 돈은 단역배우들이나 세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던 게 제가 했던 일이에요. 그때는 스텝들한테 욕 안 먹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저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고, 지금도 이런 영화들 안했을 것이고…….”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가 그리 큰 흥행은 아닐지라도 영화 제작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함께 나누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영화 스텝들, 영화 노동자들의 노고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 창작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보는 것도 한국 영화산업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영화 인생 제 2막이 시작되고 있다
소주에 사탕 먹던 시절에 만나 따로 또 같이 활동했던 형·동생들 4명이 함께 모여 자그마한 영화사 하나를 차렸다. 왜 우리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항상 돈 때문에 어떤 영화에 투여가 돼야 하고 소진되어 가는지 묻고 내린 결론이었다. 우리끼리 만들어서 우리끼리 놀 수 있는 놀이터와 공간을 만들자. 우리가 꾸준히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그 놀이터를 잘 가꿔서 많은 사람들이 놀러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 자본의 논리 때문에 못 만들었던 영화들, 일반적이지 않는 영화들,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자 했단다.
영국의 워킹타이틀 film과 같은 늘 판에 박힌 영화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그리고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quality를 책임질 수 있는 회사를 만들자는 게 모두의 꿈이다. 빨치산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도 그의 꿈이다.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의 감정들,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 그래서「빵과 장미」,「자유로운 세계」,「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만든 켄 로치 감독을 제일 좋아한다. 언젠간 소설 ‘태백산맥’ 같은 이야기들을 영화로 만들고 싶단다. 느와르를 보고 자라서 「영웅본색」,「첩혈쌍웅」같은 홍콩 느와르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 한다.

2시간여의 짧지만 길었던 그의 인생 이야기, 영화 이야기는 사무실 옆 술집에서 계속되었고, 바쁜 주인아저씨의 술상 준비를 거드는 그의 재빠르고 부지런한 모습 속에서 십여 년 전에도 그랬을 그의 제작부 막내 시절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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