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12월|기획]이주노동자 건강권 권리선언을 맞이하여

일터기사

이주노동자 건강권 권리선언을 맞이하여

한노보연 타래

이주노동자 건강권 침해 사례
#1. 버마에서 온 T씨와 Z씨는 2011년, 녹산공단의 도금공장에 입사해 자동차 부품을 6가크롬으로 도금하고 연마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이 사업장은 야간에만 몰래 가동하는 불법 공장으로 후드, 집진기, 환기장치 등을 전혀 안 갖춘 곳이었고, 보호구도 지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물질안전보건자료 미비치, 산업안전교육 미실시 등까지 불법천지인 곳이었다. 결국 T씨와 Z씨는 피부괴사, 콧속 염증, 구역, 호흡곤란, 가슴통증,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고 한노보연과 상담 후 고용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2. 필리핀 노동자 A씨는 녹산공단의 잉크공장에 2011년 입사했다. 재료 배합, 잉크제조도구 세척 등 잉크제조 공정의 모든 작업을 했는데, 공장 실내는 MEK, 톨루엔 등의 수많은 화학물질로부터 발생한 유해한 공기로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A씨는 극심한 두통과 현기증, 구역질, 안구 충혈, 피부 염증에 시달렸고, 또한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가슴통증으로 고통 받았다. A씨 역시 보호구를 받지 못했고 사업장에 배기장치는 있었지만 사업주는 단 한 번도 그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게다가 A씨는 특수건강검진 대상자임에도 건강검진은 물론 안전교육도 받지 못했다.

#3. 축산기자재를 제조하는 코카(주)에서 세척과 용접, 절단, 연마, 도장, 선반 조종 등을 해온 필리핀 노동자 3명이 올해 4월, 한노보연으로 상담을 왔다. 세척 작업을 할 때마다 심장박동이 이상하고 작업 후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피부 작열감, 무기력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세척액을 채취해 분석해보니 사염화탄소, 노말핵산 등 10가지가 넘는 발암물질과 치명적인
(사진출처=부경이주공대위)
사진1 발암물질로 세척작업을 하는 이주노동자
독성물질이 검출되었다. 코카(주) 사업주는 앞선 사업주들과 마찬가지로 배기장치 미설치, 보호구 미지급, 물질안전보건자료 미비치, 안전교육 미실시 등 관련 법규를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이에 근로감독관을 끌고 코카(주) 현장을 급습했고, 사업주를 고발 조치했다.

건강권 침해의 구조적 원인

(사진출처=부경이주공대위)
사진2 고용노동부의 사업장 변경 제한지침에 항의하는 이주노동자
앞선 사례들에서 살펴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들조차 결여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운 없는 일부의 사례가 아니다. 이주노동자가 처한 노동환경이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에 이주노동자가 직접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는 상태라는 것, 그리고 고용노동부가 이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 5년간 이주노동자의 산재발생률은 내국인 노동자보다 3배나 높다. 산재로 인정된 자료들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부당하게 불승인된 재해, 협박과 회유로 신고 되지 않은 사고와 질병들까지 고려하면 이주노동자의 산재발생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주노동자에게 가장 큰 제약은 역시 고용허가제이다. 현행 고용허가제는 매년 근로계약을 갱신해야 하고 최대 3년간만 취업을 허용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하고 있고,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으로 이주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들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근로계약 갱신을 위해서나 미등록 신분으로 인해 사업주에 메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사업주의 부당행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이 직장 이동의 자유이지만,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는 이마저의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노예노동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용노동부는 새 지침 하에 지난 8월1일부터 사업장 변경 시 새로운
(사진출처=부경이주공대위)
사진3 근로감독관의 직무유기에 항의하는 면담자들을 폭력적으로 쫓아내는 고용노동부 (울산지청)
사업장 명단을 주지 않음으로써 이주노동자의 제한적 선택이나마 아예 가로막고 있다.
위 사례들에 대응하면서 고용노동부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로감독관들은 이주노동자의 진정, 신고를 받으면 이를 사업주에게 신속히 통보해주면서, 실제 조사 감독에는 며칠씩 늑장을 부렸다. 법규를 위반한 사업주에게 위법사실을 감추라고 알려주는 사실상 범죄은닉이나 다름없는 일을 고용노동부가 저지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이주노동자들은 취하 종용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근로감독관들은 가해자인 사업주와 한 패가 되어 피해자인 이주노동자들을 다그치며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조사를 이끌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사업주 편의를 봐줘가면서도 도저히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현저한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마나한 처벌로 일관했다. 녹산공단 도금공장의 경우에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항 6건만을 인정해 과태료 46만원을 징수하는 데 그쳤고, 잉크공장에는 단 8만원의 과태료만을 부과했다. 엄중한 처벌이 마땅함에도 관리감독을 맡고 있는 고용노동부가 푼돈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는 실태는 위법행위의 근절과 노동환경 개선을 포기했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아니다.
근로감독관들의 도덕적 해이와 솜방망이 처벌은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문제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 고용 사업장에 대한 관리감독을 거의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지도점검 계획조차 미등록 노동자를 적발해내기 위한 각종 신고 및 의무이행 여부 확인과 사업주의 고충사항 파악에 머물러 있다. 이주노동자의 권리 보호는 안중에도 없고 불법체류 적발과 사업주 편의 확충이 이주노동자 정책의 전부인 셈이다. 이러한 고용노동부의 행태와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노동법의 보편적 적용의 원칙과 대단히 모순되고, 외국인 차별적이다. 이주노동자들을 노동법 적용의 예외 대상으로, 권리의 사각지대로 정부가 앞장서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주노동자 정책이 애초부터 기본적 노동조건을 마련치 못하는 기업들을 지지, 지원하기 위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고용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현재는 사양 산업에서뿐만 아니라 중소 납품업체, 대기업 사내하청업체에도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일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해 절약되는 인건비나 산업안전비용은 하청계열구조 속에서 대기업들의 이윤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영세 자본을 비롯해 대자본까지 외국인 차별적인 이주노동자 정책과 유착돼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운동, 건강권을 선언하자!
이주노동자 운동은 반인권적 행태와 임금체불, 불법체류자 추방 등의 문제들을 사회에 제기하며, 이주노동자의 인권 향상에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이에 비해 이주노동자의 건강권 문제는 상대적으로 의제화되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이주노동자의 인권 침해와 건강권 침해가 같은 구조적 원인에서 비롯하고 있고, 건강권 침해가 이주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적극적으로 건강권 의제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정하고 있는 최소한의 법적 보호 테두리에서조차도 배제되어 있는 상황은 시급히 바꾸어야 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이주노동자 상담과 사업주 고발 등을 조직하며 이주노동자 운동이 빠르게 성장해나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사진출처=부경이주공대위)
사진4 이주노동자의 엽서-마땅히 받아야 할 건강검진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열악함을 고용노동부가 조장하는 상황은 당장의 투쟁 대상이다. 고용노동부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상기케 하는 것이 투쟁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용노동부는 이주노동자의 진정과 고소를 처리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통역시스템조차 안 갖추고 있는데,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요구를 조직하며 이와 함께 이 소리를 들을 귀를 갖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올해, 이주민 인권을 위한 부경공대위와 부산/울산/경남 권역노동자 건강권대책위는 13개국 500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작성한 건강권 선언 엽서를 모아 고용노동부에 답변을 요구하며 원어 그대로 전달할 예정이다. 또한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인 12월 18일에는 부산/울산/경남의 이주노동자들이 건강권 선언을 한다. 우리는 고용허가제가 폐지되고 이주노동자 건강권이 실현되는 날까지 힘차게 투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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