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6월|서평]“인간, 마스크스를 만나다”- 마르크스 전기를 읽고

일터기사

“인간, 마스크스를 만나다” – 마르크스 전기를 읽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김 정 수

우연히 마르크스 전기를 읽게 되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 아마 누군가에게 잠시 빌렸다가 자연스레 영구 임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마르크스 전기 두 권([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미다스북스,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푸른숲)이 몇 년째 책꽂이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나, 내가 언젠가는 운동권의 성경, [자본론]을 일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우연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내가 어디선가 우연히 알게 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류동민, 위즈덤 하우스)를 구입했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 책을 내가 다시 우연히 읽게 되었고, 다 읽고 나니 자연스레 마르크스 전기를 읽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책꽂이에 두 권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전기니 만큼 그의 이론과 사상에 대한 소개가 빠질 수 없다. 그 부분을 읽는 동안 잠시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아주 유쾌한 기분으로 읽어 내려갔다. 마르크스와 유쾌함이라, 왠지 안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역사 발전과정에 대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한 그의 이론과 사상이 유쾌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론과 사상은 첨단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유쾌함보다 비장함으로 다가온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벨기에로, 다시 프랑스, 독일을 거쳐 결국 영국으로 19세기 중반 유럽, 격동의 혁명기에 반혁명집단의 탄압을 피해 망명을 다녀야 했던 혁명가의 곤궁한 삶 역시 유쾌할 수는 없었다.

나를 유쾌하게 했던 것은 마르크스와 그의 둘도 없는 절친 엥겔스의 인간적인 면모들이었다. 매우 엄격하고 엄숙하고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어떤 사람의 어리숙한 측면을 보았을 때, ‘그도 인간이구나’하면서 오히려 안심하고 친근함을 느끼는 경우처럼 전기 속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내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학창 시절 술에 취해 소동을 부리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사건, 평생 마르크스 가족을 뒷바라지 해 준 하녀를 임신시켰다는 의혹(여러 가지 정황 증거 상 그 의혹은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적을 비난하는데 핏대를 세우는 모습(그래서 마르크스는 말년에 엥겔스 외에는 거의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체스 게임에서 지고 나서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친구 엥겔스에게 빌붙어 살아도 품위를 놓칠 수는 없다는 폼생폼사의 정신, 가족의 생계를 최우선으로 삼지 않는(삼을 수 없었던) 무능한 가장의 모습, 지금 그랬다가는 큰 일이 날 수도 있을 엥겔스의 대필(마르크스 이름으로 나간 여러 가지 기사, 문건 등을 엥겔스가 대필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절친 엥겔스의 여성 편력과 부르주아지로서의 삶까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런 면모 자체보다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접한 후 내 맘이 가벼워졌다는 것이 유쾌함의 근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동구가 몰락한 이후 대학을 다녔지만 운동권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전히 정신적 스승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스승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교조주의라는 것이 나오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운동권의 숙명인지 주체사상류의 자질론, 품성론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운동권들에게 들이대는 윤리적 잣대는 훨씬 엄격하다.(운동권들 스스로도 그러하다.) 세상을 똑바로 보고, 올바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안팎에서 들이대는 엄격한 윤리적 잣대가 솔직히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스승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보라!!! 그들의 삶을 보라!!! 그들에게 윤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옳은 방법과 그에 대한 열정이 중요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삶의 구린내(좋게 얘기해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나니 그들의 이론과 사상이 우습게 여겨졌냐고 누군가 물으면 오히려 정반대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들은 신이 아니었다. 성인도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었다.(물론 마르크스는 천재였고, 그들은 시대의 영웅이었다.)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옳은 방법은 19세기 유럽의 혁명기를 살아가던 그들의 인간적인 삶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득 성경이나 불경보다 [자본론]이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자본론]을 읽고자 하는 이들은 우선 마르크스의 전기를 일독하기를 권한다. [자본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그렇다고 태어날 때부터 마르크스의 머리 속에 있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왜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처박혀 있을 수 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자본론]이 좀 더 제대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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