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1월|칼럼]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일터기사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한노보연 소장 김정수

얼마 전 고(故) 최진실씨의 전 남편 조성민씨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고(故) 최진실, 최진영의 뒤를 이은 그의 자살과 비운의 가족사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워낙 유명했던 이들에게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라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어디 이들 뿐이랴!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이들의 비참한 사연은 신문 사회면의 단골 기사가 된지 오래다. 자살이 한국인의 전체 사망원인 중 남성의 경우 4위, 여성의 경우 5위에 이를 정도로 흔하고, 10대에서 30대의 경우 사망 원인 1위이며, 한국인의 자살 사망률이 해마다 최고치를 경신하여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OECD국가 중에서 2위 일본과 현격한 격차를 보이며 10년 가까이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는 자살에 관한 통계는 더 이상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보니 원인과 대책에 대한 논의 또한 무성하다. 노인인구의 급격한 증가,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체계의 부족, 사회 전반의 스트레스 증가, 우울증 등 정신장애에 관한 이해부족과 치료 기피 등이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주목되고 있고 자살예방정책 실현을 위한 법적 기반 조성과 전문 인력 양성을 통한 체계적인 자살예방 교육 등이 대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자살이 워낙 뿌리 깊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기인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손쉬운 대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현되는 속도가 자살률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자살의 원인에 대한 논의와 대책 마련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자살을 금기시 하는 문화와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 입에 담기를 꺼려하고 자살을 두고 거짓말(거짓 사인을 꾸며내는 것)을 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자살 당사자가 자신의 사인에 대해 거짓말을 하라고 유서를 통해 권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유가족에 대한 책망은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가장 해로운 형태다. 자살에 대한 과학적, 이론적 접근 역시 마찬가지다. 한 세기 전에 나온 이론(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이 아직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과학의 다른 분야, 심지어 심리치료 연구의 다른 분야에 비해서도 자살의 이론화 작업은 더딘 속도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원생 시절 아버지를 자살로 잃은 미국의 한 심리학자의 자살에 대한 과학적 이론적 고찰은 주목할 만하다.([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토마스 조이너, 황소자리) 그가 제시하는 이론모델에 따르면 “치명적 자해를 가할 수 있는 습득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욕망할 때 자살을 하게 되는데, 죽음에의 욕망은 “짐이 된다는 느낌”과 “좌절된 소속감”, 이 두 가지 심리상태로 구성된다고 한다. “치명적 자해를 가할 수 있는 습득된 능력”에는 고통과 부상,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없는 대담성을 포함하고, 반복적인 자해에 내포된 강화적 속성도 포함될 수 있다. “짐이 된다는 느낌”은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무능하고 무력하다고 느끼며, 나아가 자신의 무능함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고, 이 무능함이 영속적이고 변함없는 것이라고 예단함으로 인해 자살에 이르게 된다. “좌절된 소속감”은 인간의 원초적인 동인(動因)인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좌절시켜, 건강, 적응, 행복에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자살 위험을 상승시킨다.

이 이론의 옳고 그름 혹은 과학적 엄밀성을 떠나 그가 죽음에의 욕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심리상태로 “짐이 된다는 느낌”과 “좌절된 소속감”을 지적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특히 자살의 사회경제적 요인에대해 고찰하고자 할 때 더욱 유용하다. 비록 저자가 자살의 사회경제적 요인에 대해서는 “짐이 된다는 느낌”의 관점에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자살 발생률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짐이 된다는 느낌”과 “좌절된 소속감”을 사회경제적 측면과 연결시켜 파악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짐이 된다는 느낌”의 다른 표현은 “좌절된 효능감”인데,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한 개인의 효능감은 그(녀)의 경제적 능력과 상당 부분 비례한다. 경제적 능력의 상실이 “짐이 된다는 느낌”으로 직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회 안전망의 부재로 인해 경제적 능력의 상실이 급격하게 일어나거나 장기간 지속될 경우 이 과정은 더욱 격렬하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기업의 일상적인 구조조정으로 인해 늘 정리해고 위협에 시달리거나 혹은 실제로 정리해고를 당하는 상황, 잦은 이직과 조기 퇴직으로 더 이상 ‘평생직장’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고용상태가 매우 불안정한 상황. 이러한 상황이 “좌절된 소속감”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리라는 것 역시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 혹은 일을 매개로 한 사회적 관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한국인의 노동시간 혹은 일중독 지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사회적 소속감의 좌절은 다른 개인적 관계에서의 좌절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노인 일자리 대책, 청년 실업 대책, 정리해고 방지 대책, 비정규직 철폐 등은 자살 예방을 위한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대책이라 할 수 있다.

아내가 자살하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아내 뒤를 따른 어느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통장잔고가 4만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리해고는 당연히 철폐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짐이 된다는 느낌”과 “좌절된 소속감”이 저절로 개선될까? 한 개인의 효능감이 경제적 능력과 상당 부분 비례하는 사회, 많은 사람들이 일 혹은 일을 매개로 한 사회적 관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정리해고가 철폐 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비정규직이 철폐된다고, 일자리가 많아진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자살을 욕망하는 누군가가 “짐이 된다는 느낌”을 극복하고 “좌절된 소속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 같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저 이 세단어가 그것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공감(共感), 공유(共有), 그리고 희망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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