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2월|이러쿵저러쿵] 19살 노동자의 죽음을 접하고

일터기사

19살 노동자의 죽음을 접하고
한노보연 회원 김정곤
조금 전, 2월 7일(목) 16시 경 거제도 대우조선에서 19세(94년생) 하청노동자가 노동재해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 마음을 다스려 보지만 분노에 피눈물을 흘린다. 어김없이 올 초부터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고 있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골병들지 않고 노동할 권리가 우리들에게는 없는가? 신자유주의 침략자들과 구린내 나는 더러운 정치꾼들에 의해 죽음으로, 거리의 노숙자로, 구조조정의 실업자로, 생활고에 못 이겨 범죄자로 내몰리는 현실에 내내 가슴 아파한 작년 한 해였는데 말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란 말을 들어왔고, 그 신자유주의란 놈이 어떤 놈인가를 너무나 잘 알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이놈은 커져만 간다. 그러나 87년 대투쟁을 기점으로 우리의 현장 조직력은 서서히 실리와 타협, 개량과 투항으로 분열되어 가고 있다.
무너진 현장, 우리의 희망을 찾기란 힘든 것인가? 우리의 희망은 서로가 힘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동지애로 뭉쳐진 단결투쟁이며, 노동자가 힘이 되어 주는 현장, 그 현장에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장은 자본가의 현장통제로 인해 갈수록 조직력이 약화돼 대항조차 힘들다.
이러한 지금의 상황을 돌파하고, 저들에 맞서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일상 활동 강화뿐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스스로 현장자치권을 확대해 개량과 타협을 예방하고 견제하며 민주적 운영으로 스스로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열악한 작업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 확보, 적정 노동시간으로 생산량을 통제해 나가며 자본의 현장통제 쇠사슬을 끊는 것이다.
노동강도 강화저지와 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한 투쟁만이 전 사업장의 근골격계와 노동재해 추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개량과 투항은 있을 수 없으며, 타협과 실리만을 낳을 뿐이다. 이것을 따를 순 없다. 누구는 운동판이 커졌다고 하지만, 몸뚱어리 하나가 전 재산인 노동자의 현실을 보면, 87년 때 보다 2배 이상 후퇴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된 현실,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여전히 노동강도 강화 저지 투쟁은 노동운동의 중요한 투쟁이 아니지 않은가? 노안담당자의 몫, 전문가 별종들이 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 아닌가?
우리는 19년 전 삼풍백화점(사상자 1,399명)이 붕괴한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해에 삼풍백화점이 일 년에 60번이 넘게 붕괴되는 것과 맞먹는 산업재해를 접한다. 작년 한 해 노동현장에서 노동재해로 죽고, 다치고, 골병든 노동자들의 총계가 이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도 노동현장에서는 “고용이냐, 생명이냐”의 잔인한 선택을 강요당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파괴당한 현장을 복구하고, 골병과 죽음의 현장을 멈추기 위한 노동보건활동이 절실하다. 교육하고, 조직하고, 실천하는 일을 그 어떤 이유로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죽음의 공장, 절망의 공장을 희망의 공장으로 세우고, 노동현장에서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드는 길이 여전히 중요한 과업임을 잊지 말자,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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