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3월|이러쿵저러쿵] 안녕하세요!

일터기사

안녕하세요!

한노보연 운영집행위원 재현

안녕하세요. 저는 연구소 신입회원인 재현입니다. 이렇게 지면으로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새롭게 연구소의 구성원이 된 만큼, 제 소개를 드리고 싶어 일터의 지면을 할애 받아 글을 싣습니다. ^^
저는 올해 27살이고 지난 2월에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돈 있고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을 위한 우열반이 있는 평범한 사립학교였구요. 물론 저는 열등반이었어요 ㅎㅎㅎ. 고교생활은 예민한 나이에 빈부의 차를 느끼게 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겨레 사설을 열심히 챙겨보는 수험생이었어요. 친서민적인 노무현 대통령을 깎아내리는 조중동과 보수집단을 욕하면서. 훗날 정치가가 되리라 꿈을 꾸기도 했죠. 그리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알았죠. 착한 학생이 얼마나 체제 순응적인 사람이라는 걸 말이죠.
고등학교 졸업 후 점수에 맞춰서 충주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대학에 낭만 찾을 수 없고, 학교 주변은 온통 논바닥, 비오는 날 우렁찬 개구리 소리만 가득한 곳. 결국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꼬박 6시간 통학을 했습니다. 그러다 학교 로비 바닥에 굴러다니는 교지를 발견하고 교지편집위원회에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 교편위는 운동성향이 있다는 이유로 반운동권 학생회의 탄압을 받아 전년도부터 교지대금을 빼앗긴 상황이었구요. 스스로 찾아간 교편위에는 선배 3명과 1년간의 교지 발간을 할 수 있는 시한부 유예기간, 이월금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교편위 생활은 학생회에게 매번 치이고 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흥미가 사라지며 교지를 등지고, 당시 대학원에 다니던 선배의 추천으로 사회과학 책을 보고 토론하는 동아리에 찾게 됐어요.
그런데 이 동아리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저랑 같이 입학한 동기와 대학원 선배 한명이 지키는 동아리였죠. ㅠㅠ 그렇게 맞은 겨울방학, 저는 빈민현장활동(철거투쟁에 연대하는 학생활동이라고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꺼에요!)이라는 것에 참여하게 됐어요. 서울 미아동이었는데 5일내내 주민이 쫓겨난 빈집에서 자고 함께 생활하며 용역 깡패를 대비해서 불침번도 서고. 철거민들의 삶도 나누고 투쟁가도 배우고 집회도 하고. 이때 경험이 제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얼마나 더럽고 야비한지. 무엇보다 내가 지지하는 노무현과 정치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왜 가만히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여성주의/페미니즘’이라는 생소한 말을 듣고 받았던 충격 또한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그 다음해 2학년 여름에는 뉴코아-이랜드 투쟁에 연대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실천단을 구성해서 말이죠. 고백하자면, 당시엔 노동자의 투쟁에 연대라는 관점보다는 잘못된 비정규직보호법 때문에 보호받아야 할 여성, 어머니들의 싸움에 힘을 보태자는 마음이었어요. 집회도 꾸준히 가고 점거도 동참하면서 많이 울고, 생각도 많아지고, 저도 많이 변화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제가 새롭게 태어난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3학년이 됐는데요, 어느덧 선배라는 위치가 되고 보니 학교에서 활동도 바빠졌는데, 때마침 광우병 촛불이 번지던 시점이라, 열심히 양초 구입하러 다니며, 촛불집회를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활동했던 경험을 토대로 학생회 선거에 출마도 해봤는데, 보기 좋게 떨어지는 아픔도 겪었지요. 결국 선거 후에 저는 군입대를 결심하게 됐고, 같이 활동하던 후배들은 동아리를 떠나고, 선배들도 졸업을 하고 떠나면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정리되어 버렸어요.
그렇게 강원의 양양에 위치한 부대에서 맞은 군생활, 그나마 운이 좋게도 도서관 시설이 좋은 부대였어요. 그렇다고 볼만한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난생 처음 교과서에 있는 시가 아닌 시집을 꺼내 읽게 되었죠. 그 때 읽었던 시들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감수성을 잃지 않게 했던 같아요. 그때부터 좋아하는 시인도 생기고 허접하지만 시를 써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렇게 전역을 하고는, 앞으로 뭘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됐는데요. 때마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자 동지의 여성가족부 앞 농성장에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분들이 농성장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소식에 매주 목요일 오후에 도시락과 막걸리를 싸들고 연대를 갖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그곳에서 저는 막걸리 총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답니다. ^^
농성장에서 저는 노조가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고 피해자와 대리인만이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이 때 상황은 매우 충격을 받았어요.. 노/노 갈등을 이용해 현장을 분열하는 것에 더해 여/남의 권력관계를 이용해 자본이 여성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여성문제가 운동사회에서 매번 부차화 되는 것에도 맞서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 받는 모든 여성과 소수자 문제에도 관심 갖고 싸워야 한다는 고민을 갖게 되었죠.
작년 경쟁력 없는 학과는 없애버리겠다는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된 학교로 복학하게 됐습니다. 오히려 학교의 구조조정을 지지하고 총선에서 새누리당 지지를 선언하는 학생회 벽에 부딪혀 혼자 뭐 하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지만 그렇게 4학년을 보내며, 저는 졸업 이후의 삶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청주에 오픈한 희망식당 호스트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고민도 나누며 말이죠. 그리고 올해 1월 반올림(삼성반도체 백혈병 투쟁하는 반올림, 아시죠?) 자원 활동을 하면서 연구소도 알게 됐구요.

제게는 두 가지 꿈이 있어요. 첫째는 지역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건데요. 노동자들과 시도 읽고, 글도 쓰고, 악기도 배우고, 재봉틀로 옷도 만들고, 음식도 나누는 등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노동자가 자본에 필요에 의해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는 그런 공동체. 여남이 평등한 관계를 고민하고 함께 살아가는 곳.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공동체를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고 함께 변혁의 주체로 서 나가는 것. 이러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꿈이 있어요.
두 번째는 즐겁고 행복하게 활동하는 건데요.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이렇게 사는 삶 또한 있고,.가능하다는 것을 제 또래의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제가 꿈꾸는 사회를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연구소 회원이 되면서 세 번째 꿈을 구상 중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연구소의 다른 회원들과 일하는 모든 이가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꿈꾸는 밑그림을 함께 그리고 싶어요. 일터 독자 여러분과도 함께요! 응원해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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