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3월|일터다시보기] “내 건강을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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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건강을 사세요”

한노보연 회원 김진현

3월이다. 봄이 오려면 한참 남은 듯한 날씨인데, 사람들은 입학이다 취직이다 난리법석이다. 뒤늦은 나이에 훈련소로 가게 되어 밀린 숙제 하는 느낌으로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올해에야 간신히 취직을 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고액의 연봉을 손에 쥔 친구부터 백수 코스프레를 한다는 친구까지 공통의 화젯거리는 ‘일’이었다.

한국 땅 최고의 학벌을 가진 친구는 역시 학벌에 걸맞게 민족정론지를 참칭하는 유명 신문사의 기자가 되었다. 사회부에 소속된 그는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고임금 노동자였지만 취재 때문에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 잔다고 한다. 사시의 높은 문턱 앞에서 몇 번이나 좌절했던 법대 친구는 결국 취직을 했다. 회계팀에 배속된 그는 자신이 수년 동안 갈고 닦아 왔던 법지식이 아무 소용없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매일 회계 공부를 위해 야근을 한다고 했다.
노동자로 살겠다고 공장으로 들어간 친구는 최연소 노동자의 영예를 누리며 매일의 잔업특근에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말로만 들어도 기겁할 노동강도에 시달리다 옆에 있는 중년 여성노동자에게 허리 아파서 어떻게 일하냐고 물었더니, 웬걸 사모님이란다. 끝도 없는 업무량 때문에 화장실 한 번 가지 못하고 일하는 작업장에 턱하니 사모님을 데려다 놓은 사장의 염치라니. 백수 코스프레를 한다며 콧수염과 턱수염을 충만히 기르고 나타난 친구는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다고 했다. 어디든 취직만 되면 가고 싶지만 그래도 아직 영화에 미련이 남아 영화 마케팅 쪽 자리를 알아보고 있단다.
지난 호에 실린 ‘자동차 부품제조 하청공장의 여성노동자 – 최저임금과 맞바꾼 노동자 건강권’을 읽으며 든 생각이 있다. 노동자가 가진 건 몸뚱이 뿐이라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최저임금을 받으려 값비싼 우리 건강을 팔아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임금 노동자든, 최저임금 노동자든 힘들게 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매일 잠 못 자고 야근해도 임금 수준이 높으니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최저 수준인 임금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잔업특근을 찾아서 해야만 하는 노동자나 비극인 건 마찬가지다.

더구나 주인공은 이게 비극인 걸 전혀 모르니 더 비극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요즘 세상에 일자리라도 있는 게 어디냐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자신의 노동과 건강을 평가절하 하는 노동자들을 보며 몇 년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관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화감독이 동료에게 묻는다. “우리가 최저임금도 못 받고 있는 거 알지? 우리 노동조합이라도 만들어볼까?” 동료가 답한다.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노동도 아니야.” 자신의 피와 살을 깎아내면서 일해야만 그걸 노동이라고 부르는 현실. 오늘날의 노동은 새 정의를 얻었나 싶었다.
이걸 바꾸려고 늦은 나이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간 그녀의 선택은 과연 원했던 걸 얻을 수 있을까. ‘한 마리 애벌레가 되어 다시 현장에서 나의 남은 삶을 소진하고 싶다’는 문장을 읽으며 짠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활강하기엔 아직 바깥 날씨는 너무 춥다. 노동자 건강권을 외치다 목이 쉬어버릴 것 같다. 투쟁은커녕 자기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바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외치며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전에 회사 측에서는 기계를 설치해 그녀의 손목통증을 해결해 주겠다던 약속을 지킬 것인가.
그저 잘 되겠지 하는 식의 맹목적 낙관은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다만 노동운동을 살려보겠다고 공장으로 돌아간 친구의 결의에 답해서 항상 현장에 가까운 활동가로 살 것을 맹세해야 할 것 같다. 입으로만 노동자 건강권을 이야기하고 펜으로만 노동운동의 혁신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겠다. 물론 지금은 잠깐 논산에 가서 뜀박질이나 해야겠지만, 퇴소할 4월에는 봄이 완연할 것이다. 그때는 금사공단 자동차부품 하청업체에서도 벚꽃 같이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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