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 알아보자 LAW동건강] 법적·규범적 판단으로 재해자 권리 보장하는 질판위를 기대한다

일터기사

법적·규범적 판단으로 재해자 권리 보장하는 질판위를 기대한다

이성민(회원, 노무사)

종교는 없는데 자꾸만 기도한다. 지금 진행하는 사건들이 잘 해결되길 바라서다. 산업재해 사건에서 가장 큰 바람은 재해자의 상병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것이지만, 요즘은 질병판정위원회 구성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거나, 처분 결과와 무관하게 나와 재해자 모두가 판정 근거를 받아들일 수 있기라도 바라는 소심한 기대가 대부분이다.

최근 나의 기도가 부족했는지, 최초 신청 단계에서 불승인 처분을 받은 산업재해 사건들이 있다. 사건을 진행하며 두 노동자의 업무 내용과 작업 환경을 살펴본 결과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30대 노동자

대기업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사내 하청업체 소속 설비 엔지니어로 근무한 젊은 노동자가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재해자는 대학을 졸업한 뒤 27살부터 이 일을 시작하였는데, 주로 800~1,200도가량의 고온에서 여러 화학물질을 확산시키는 공정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재해자의 진술과 해당 공정에 대한 연구 결과 등을 살펴보니 재해자가 비소를 포함한 각종 유해 요인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다.

사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해자는 요 중 비소 검사를 시행했다. 예상대로 재해자의 몸에서 상당 수준의 비소가 확인되었다. 비소의 반감기 등을 고려할 때, 신체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정도였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대학병원 직업환경의학과에서 업무 관련성 소견서도 발급받아 제출했다. 이 사건은 역학조사 없이, 곧바로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심의하였다. 비슷한 시기 첨단전자 산업에서 발생한 파킨슨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한 법원의 판례도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35년간 근골격계 부담작업을 수행한 노동자의 고관절증

두 번째 사건의 재해자는 약 35년간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금형 생산 업무를 수행한 노동자다. 고통을 감내하던 재해자는 끝내 걷는 것조차 어려워져 고관절 부위에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고, 용기를 내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재해자의 업무는 대부분 상당한 무게의 중량물을 취급하거나, 쪼그려 앉기, 허리 숙이기, 무릎 꿇기 등 부적절한 자세를 유지하며 사상 작업등을 실시하는 것으로 허리나 고관절 부위에 상당한 부담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조합의 조력 등으로 작업 동영상 및 사진 등을 폭넓게 확보하였고, 현장 조사와 특별진찰 등 없이 질병판정위원회 심의가 이루어졌다.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질병판정위원회는 두 사건 상병들의 업무 관련성을 부정했다. 첫 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재해자 몸에서 다량의 비소가 확인되었음에도 비소에 노출되었다는 객관적 증거가 없으며, 재해자가 노출된 유해 요인이 파킨슨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두 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심의에 참여한 질병판정위원회 위원 모두가 재해자가 수행한 업무가 고관절 부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지만, 이 사건 상병은 개인적 질병에 가깝고, 재해자가 수행한 부담 작업이 신청상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역학적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즉, 질병판정위원회는 이 사건들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기 위해 엄격한 의학적·과학적 입증을 요구했다. 나는 판정서를 읽으며 수없이 중얼거렸다. 업무상 재해는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과학적 근거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재해 여부는 법적·규범적 판단 영역이라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하여 설명했다. 특히 위 사건들처럼 의학적·과학적 근거에만 치우쳐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재해자 권리 보호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작동하는 산재보험의 취지를 강조하고 있다.

대법원 2004.4.9. 선고 2003두12530 판결 등 참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 제1호에서 정하는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법적,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이 사건 상병의 경우 희귀질환의 발병 사례가 많지 않고 연구 방법도 환자대조군 연구에 한정되어 있으며 역학적 연구가 수행되기 어려워 그 발병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질병인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 사건 상병과 원고의 업무 사이에 관련된 의학적, 과학적 증명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건 상병과 원고의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

질병판정위원회는 법원과 같은 기준을 토대로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수많은 질병판정위원회 판정들이 이를 무시하고 있다. 일부 위원들이 판정 기준을 모르는 것인지,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덕분에 재해자들은 산재보상을 포기하거나, 소송이라는 긴 싸움을 준비하며 불안정한 삶을 견뎌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질병판정위원회를 바라며

앞선 파킨슨병 사건 심의 당일 의견 진술을 위해 3분 남짓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날의 질병판정위원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위원장은 대리인이 발언하던 중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라며 말을 잘라냈다. 차마 못다 한 발언엔 「업무상 재해 여부는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는 점」이라는 당연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라던 이 사건 판정서에는 「관련성이 알려진 바 없다」, 「노출의 객관적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의학적 관련성이 확인된 바 없다」 등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내용만 잔뜩 담겼다. 법적·규범적 판단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날의 위원들은 법원이 제시한 판단 기준을 잘 모르거나 무시했던 것 같다. 법의 취지와 기준을 이해하고 있는 위원들이 참석한 다른 날 심의가 이루어졌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질병판정위원회 심의는 위원들의 개인적 잣대로 논하고, 결정할 내용이 아니다. 원칙과 기준, 법의 취지를 고려한 책임감 있는 논의와 판정이 필요하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질병판정위원회는 그렇지 못하다.

내일도 다른 사건의 질병판정위원회 심의가 예정되어 있다. 의미 없는 행동이지만 부디 위원 구성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도하고 있다. 언젠가 모든 질병판정위원회를 신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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