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 3월 | 칼럼] – 노동아, 힘내라!

일터기사

노동아, 힘내라!

한노보연 선전위원  타래

글을 쓰기 위해 건강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현재 힘을 더 하고 있는 활동들을 되돌아본다.

첫째로 「녹산노동자 희망찾기」사업이다. 서부산의 녹산공단은 중소영세사업장들이 다수고 노동조합은 거의 발도 못 붙이는 매우 열악한 노동환경이라서 금속노조와 지역단체들이 힘을 모아 조직화 사업을 벌여온 곳이다. 최근에는 2011년 12월 30일 언론보도로 알려진, 비파괴검사 사업장에서의 방사선 누출사고 대응으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다. 대응 과정에서 작업현장의 어처구니없는 안전관리 실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방사선 동위원소 사용에 대한 공적 관리가 원자력안전기술원과 고용노동부로 이원화돼있는 가운데, 사실상 고용노동부의 행정관리는 전무하고 그렇다고 원자력안전기술원의 행정이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게 드러났다. 이러한 구조적 사각지대 안에서 기업들은 안전기준을 신나게 무시해왔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의 몫으로 남았다. 이에 고용노동부의 책임과 구조적 개선을 중점적으로 요구했고, 관할지청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녹산공단과 인근의 김해에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의 현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어려운 걸음으로 찾아온 이주노동자들과 상담하며 임금체불, 비인격적 대우 등의 문제만이 아니라 유해물질로부터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 실태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주민 단체와 함께 이주노동자를 설득했여 고용주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고발하며 처벌과 시정을 요구했고 실제 벌금이 부과된 사례가 최근에 두 건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라도 기꺼이 맞아줄만한 솜방망이 처벌을 보며 유명무실한 법에 다시금 분노했다.  

두번째로는 지역의 동지들과 꾸준히 함께 해온 반올림 활동이 있다. 격주로 선전활동을 통해 부산시민들에게 반도체/전자산업의 노동현실을 알리고 피해자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벽을 가득 채우는 피해자들의 영정 앞에 선 시민들의 마음이, 이윤보다는 인간에게로 기움을 느낀다.

보다 좋은 제도로 건강권 지키기?
여러 활동들을 하며 막연했던 노동안전보건운동, 혹은 건강권 쟁취 운동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다듬게 된다. 특히 ‘주체를 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임을 많이 느낀다. 유인물과 선전, 조직 활동을 통해 당사자들의 참여와 조직을 항상 촉구하지만, 운동의 실제 모습은 운동단체와 그 회원들, 상임활동가가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실망만 하는 건 아니다. 녹산공단 방사선 누출사고가 있었을 때 구조적 관리부실 문제와 고용노동부의 책임을 제기하면서, 관할지청에 의한 일제검사와 건강진단, 제도개선 필요의 환기 등을 이끌어낸 것, 이주노동자와 함께 고용주의 산안법 위반을 고발한 것, 그리고 지역에서 반도체 직업병 문제의 이슈화 등에서 운동의 의의와 보람을 느낀다.

그 과정을 이렇게 요약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묵인되어온 사회문제들을 고발하고 이슈화하며,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화한다. 정부기관과 기업들을 압박해 그들의 태도와 제도를 바꾸며,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층을 정상사회로 통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건강권 쟁취의 의미를 말해보면, ‘안전과 건강에 관한 호혜적 제도, 질서의 구축’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는 잘못되거나 불충분한 법제도를 개선하고, 또는 법제도의 엄격한 시행을 강제하는 공적체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소외층과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주체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그런데 함께 살고 있는 친구를 보면 다시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친구가 교대제로 심야노동에 종사하는데, 아침에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생명력 같은 게 깎여 나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병약하고 골골한 심야 노동자들. 과연 이들까지 포괄할 수 있는 ‘호혜적 제도, 질서의 구축’이 정말로 가능할까? 문제는 교대제, 심야노동 자체가 폐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심야노동과 같이 태생부터 질적으로 인간의 몸을 거역하는 형태의 노동이 건강권과 함께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모순이고 기만이다.

이처럼 교대제, 심야노동과 같이 제도적 보호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애초의 설계와 구조 자체가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동이 널려있다. 반도체와 함께 발암물질이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사실이 밝혀진 반도체공장, 하지정맥류와 불임, 우울증을 양산하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사람목숨 공양해 짓는 건설업, 파리 목숨 조선업, 그자체로 병리적인 불안정 노동 등등.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같이 자본의 작품들이다. 자본은 노동자의 시간뿐만 아니라 몸과 삶까지 붙들어 그의 잉여노동은 물론 건강, 생명까지 흡수해가며 끝없이 증식하며 질주하고 있다.

이렇기에 건강권의 온전한 실현은 노동이 자본의 논리에서 해방돼 스스로가 정한 원칙과 기준 하에서 재조직됨을 전제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권이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체를 형성하자는 입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노동이 힘내지 않으면 우리가 염원하는 건강권은 요원하다.

그래서 노동아, 오늘도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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