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ㅣ3월ㅣ새 세상 열기] – 인권? 어렵지 않아~요!

일터기사

<새세상열기_인권편을 마치며>

인권? 어렵지 않아~!

인권에 대한 애매한 문제들, 그 사람이 되면 보인다.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박 진

예전에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탄핵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탄핵규탄 촛불집회를 했습니다. 그만큼 여러 사람의 공분을 사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의 사설이었던가, 제목이 국회가 미쳤다였습니다. ‘미쳤다는 누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했을 때 이를 이르는 관용적 표현이지요. 그래서 저도 당연히 국회가 미쳤다는 표현이 귀에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장애인권교육을 하기 위해서 찾아간, 어떤 곳에서 한 장애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신문의 사설을 보면서 너무 수치스러웠습니다. 소위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는 당사자로써, 미쳤다는 표현이 가지는 혐오감이 제 인권을 침해했습니다.”

그의 말이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인권감수성으로 세상을 보자는 교육을 하러 간 곳에서 정작 내가 배웠던 것입니다. 당사자의 입장,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깨달음을 줍니다. 차별이 무엇일까 인권침해가 무엇일까, 가늠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언젠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는 이런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인권활동가대회의 화장실인만큼 좀 달랐으면 좋겠어요. 저는 늘 남녀, 양성으로만 표시된 화장실이 불편한데,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국 그해 인권활동가대회 장소의 화장실은 남,녀 표시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화장실 입구에 사용 중인지 아닌 지만을 확인하는 표식을 걸었고 남,녀 구분없이 자유롭게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의 고민을 담아, 해결책을 만들어냈던 것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이 아닌,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 소수자의 문제를 찾고 해결하려 합니다. 인권침해의 당사자를 타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것도 사례입니다. 장애시설인권조사를 갔던 어떤 대학원생의 이야기입니다. 산속 깊은 곳에 제법 깨끗한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보고 나온 그 대학원생은 함께 시설조사를 갔던 인권활동가에게 말했답니다. “, 이정도면 살만 한데요.” 그이는 SOS구조대 같은, 노예노동을 하는 장애인들과 그런 시설을 상상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비인간적 관계나 비위생적 환경이 아니니 살만하지 않겠느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인권활동가가 물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살 수 있어요?”그러자 대학원생은 얼굴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은 여기, 갇혀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감금된 생활을 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으니까요. 그 곳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도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 유배되어, 감금되어 배제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장애인들은 이 정도면, 살만하겠네. 이런 곳에 살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인권을 대할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타자화의 함정이겠지요.

그 정도면 됐어” “지금 중요한 것은 인권이 아니야” “인권같은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이런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타인이 당하는 인권 침해, 차별과 때로는 자신이 당하면서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쉽게 던지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인권이란 것은 공기와 같아서 희박해질대로 희박해지면 그제서야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구제하려고 해도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힘든 치명적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왜, 타인의 인권문제를 자신들이 재단하고 판단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파죽겠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배가 부르다’ ‘지금은 시기상조다라고 하는 모든 대답들지금, 나는 던지고 있지 않은가 되물어 봤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인권이 우리가 가진 마음가짐의 문제였어?”라고 질문 하는 당신답은 물론, 아닙니다. 인권은 사람의 착한 심성만으로, 인권감수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개인들의 문제, 결단코 아닙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 빈곤을 강요하는 체제, 차별을 유지하려는 사회이러한 구조와 제도가 개인들이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겠습니까? 그래서 인권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라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지는 것이 인권, 발명되어지는 것이 인권이라고 하지요. ‘천부가 양도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근대 시민 혁명 시기 때 나온 말이지요. 그때는 하나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이야, 그래서 인권은 당연한 거야.” 라는 사회적 합의와 설득이 필요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인권은 인권침해를 당하는, 억압된 사람들의 저항을 통해서 얻어진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권 증진이라는 인류의 과제는 인권억압을 극복하려는 피억압자들의 저항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러한 저항이 새로운 법과 제도를 탄생시키고 또한 이를 강제하는 집행체제가 출연하고인권 발전은 역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인권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만을 오래 한 것은, 인권이 가진 성격때문입니다. stammers라는 양반은 인권운동은 특정시점에서 특정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어떤 권력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그 대항권력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역사적 관점에서 상대화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제도화의 역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문제는 인권운동은 모든 권력의 본질을 꿰 뚫어본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운동이다라는 조효제 교수의 말처럼, 권력의 본질을 찾아내고, 늘 경계하는 것에, 바로 인권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권감수성을 갖는 것이 모든 것의 답은 아니지만, 인권의 피해자, 가해자, 옹호자들이 인권감수성을 통해 훈련받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적어도 극한의 인권침해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로부터 시작되는 인권의 혁명, 권력의 경계, 인권을 타자화하지 않는 시선. 인권? 그렇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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