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5월|이러쿵저러쿵]상식을 뒤집고 싶다.

일터기사

상식을 뒤집고 싶다.

한노보연 회원 김 재 광

나는 말로 하는 것을 참 잘한다. 때로는 말만 잘하는 것 아닌지 자문하기도 한다. 아무튼 사회, 연설, 교육, 선동 등등 뭐든 나름 자신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육은 정보나 지식의 전달 뿐 아니라, 공감을 형성해야 하는 ‘종합예술’로 아파서 열이 펄펄 나다가도 청자 앞에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 지신도 놀랄 만큼 ‘굿(good, exorcism)’이다.
그런데 요 근래 문제가 생겼다. 교육이 끝나고 나면 찝찝하고 이전에 희열에 가깝게 느꼈던 청자의 반응도 없다. 이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지라 한동안 원인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어느 날 문득 답을 찾았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 의심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문제를 왜곡하고 있지 않나?’, ‘듣기는 좋지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가?’ 바로 나의 철학과 사물에 대한 정의에 대한 지루함과 불만족함이 나의 말을 위축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사춘기 때 세상에 대한 안목을 정립하면서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것처럼 마흔이 꽤 넘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다. 이 혼란과 고통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고, 한동안은 말로 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 고통일 것이다.
요즘 내가 고민하는 명제는 ‘자유’, ‘민주주의’, ‘정의’다. 피착취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자유부르주아지에게 여전히 의존하는 것, 나아가 희망을 거는 것, 현상적으로는 ‘닥치고 반MB’, ‘무조건 야권연대’의 사회적 현상은 매우 고통스럽고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경향을 가지는 개별 노동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정(正)이라고 표상되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라는 인식과 관념이 거기까지이고, 나 역시 이것들에 대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이 설파한 개념과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설파한 이것들의 개념은 특정한 시기에 인류를 진일보시켰고, 그 역사적 축적의 근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해방으로 진전하기에는 이것들에 대한 기존의 관념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독이 되고 있다. 익숙한 것 같지만 대단히 취약하고,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관념과 개념으로 주체화되지 못한다면, 참으로 긴 시간 이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어 허구의 정치와 삶, 농락의 정치와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최근 정권과 자본의 추악한 부패와 타락이 압력밥솥 수증기처럼 올라오고 있음에도 통진당 사태 덕분에 가려지고 있으니 역사는 묘하다. 때문에 앞서 고민이 더욱 더 깊어진다. 스스로의 철학과 담론을 가지지 못하는 세력은 역사의 종속자일 뿐이다. 최근의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그렇게 보인다. 이것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소위 식자층이라고 설레발을 치던 그들의 책임도 결코 적지 않으며, 지금도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낡은 ‘자유’, ‘정의’, ‘민주주의’의 척도로 세상을 교화하려하고, 자신이 비판하는 자만큼 그것들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각자 나름의 영달과 유희를 즐긴다. 이런 모습에 나는 ‘이건희’를 필두로 하는 자본가와 ‘이명박’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의 대리자에게 느끼는 분노보다 더한 분노를 느낀다.
이쯤 읽은 독자들은 지금 쯤 이런 생각이 들것이다. “이 친구, 뭔 말이야?” 맞다. 나는 요즘 분노와 혼란으로 말을 하기가 어렵다. 앞서 언급한 그런 것들에 대한 정의를 다시 만들어야 하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로 다시 정립해야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데 언급한 바와 아직 사춘기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시 맞이하여 그것들을 다시 정리 중이라 뭐라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염증으로만 가지고 있다. 내 상태가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일상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념이 내가 비판하는 그들의 철학에서 한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리하여 나의 행위도 그것에 갇혀있지나 않은지 자문했으면 한다.
이 혼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무언가 정립하고 나서 다시 ‘이러쿵.저러쿵’에서 만났으면 한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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